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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Sep 14. 2022

에피쿠로스의 관조로 즐기는 죽음의 일광욕

신촌. CGV. 썬다운.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감각하는 이상 죽음은 필연이다. 태어나는 순간 태어남은 과거가 되고 죽음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나 언젠가 도래할 미래로 남아 있다. 시간의 선에서 현재에 존재함에도 인간은 흘러가는 과거를 붙잡으며 다가오는 미래를 미루려고 한다. 미래란 곧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니 말이다. 하지만 잔인한 악당이라 하여 죽음이 빨리 오는 것이 아니요, 위대한 영웅이라 하여 죽음이 늦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기에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두렵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생애의 순간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생애가 태어나면서 죽는 그 순간까지 한 인간이 겪는 모든 인연, 감정, 사건 등의 총체라면 생애란 인간이 살면서 시간을 감각한 총량이라 할 것이다. 물리적으로 말하면 자신이 감각해온 시간의 총량이 단 한 순간에 소멸해버린다는 것은 곧 그만큼의 힘이 인간에게 가해진다는 것이니 죽음의 고통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갑작스럽게 다가오든, 천천히 다가오든 죽음 앞에서는 벌벌 떨 수밖에 없다. 얼마나 거대한 고통이 가해질 지 상상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실 죽음은 시간과 무관하다. 애초에 죽음은 시간과 짝이 아니다. 죽음은 존재와 짝이다. 존재하기에 죽음이 다가오며 죽기에 존재는 찬란하다. 존재가 자신의 짝인 죽음을 사랑할 때 인간은 과거-현재-미래로 구성된 시간 선과 무관하게 지금 여기에 있는 자기 존재에 더 충실해질 수 있다. 시간은 더 이상 선이 아니라 존재가 서 있는 바로 그 곳, 하나의 공간 그 자체가 된다. 둥근 지구 위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살았음에도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안 것이 아직 500년이 넘지 않았다. 어쩌면 시간이 선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인식으로만이 아니라 체득하여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려면 더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공간과 자연화했을 때 죽음은 하늘 위에 떠 있는 태양의 빛처럼 너무 당연한 무엇일 뿐이다. 죽음이 존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그 사실을 인간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날이 올지는 알 수 없다. 그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인간을 본다면 아마 그 모습이 영화 <썬다운>의 닐 베넷(팀 로스 분)과 같을 것이란 건 분명하다.

출처. 왓챠피디아

1.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와 죽음 : 서양의 노자

<썬다운>의 닐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를 잠시 살펴보자. 존재와 동전의 양면인 죽음은 너무나 당연하다더니 결국 죽는 것이 무서우니 죽기 전에 즐길 수 있는 건 다 즐겨보자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쾌락주의라는 이 말 자체는 에피쿠로스 학파를 지나치게 단적으로 설명해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말이다. 한국의 교과 과정에서 처음 에피쿠로스 학파를 배울 때면 자연스럽게 스토아 학파와 비교해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 스토아 학파는 금욕주의라고 아주 단편적으로만 배우게 된다. 특히 스토아 학파-금욕주의라는 반대항 때문인지 에피쿠로스 학파-쾌락주의는 더더욱 왜곡되어 인간이 즐길 수 있는 모든 쾌락을 긍정하며 죽는 날까지 후회없이 쾌락이나 즐기자는, 뭔가 혹하면서도 이것이 대체 무슨 철학인지 알 수 없는 요상한 개똥 철학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쩌면 아주 당연하게도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의 광기에 빠져 죽는 순간까지 인생을 낭비하자는 허무주의적 쾌락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에피쿠로스 학파는 서양의 도가라고 할 만큼 쾌락에 대한 자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남아 있는 문헌이 많지는 않으나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에피쿠로스의 학설이 작게나마 남아 있다. 재밌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는 데모크리토스로부터 시작된 원자론의 전통이 에피쿠로스를 거쳐 루크레티우스 본인에게 이어져 왔음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물질적 요소인 원자를 기반으로 세계를 기계의 원리로 파악하는 원자론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에피쿠로스의 이론은 논리의 선후가 시간에 기반해 있는 듯하다.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육체와 영혼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생각을 알아보자.

"더욱이 우리는 이성이 육체와 함께 나서 같이 자라고 함께 늙어가는 것을 감지한다. 왜냐하면 마치 아이들이 굳지 않은 여린 몸으로 뒤뚱거리듯 정신의 연약한 사고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강건한 힘으로 나이가 성숙하면 분별력도 더욱 커지고 정신의 힘도 더욱 증가한다. 하지만 그 후에 육체가 세월의 강한 힘에 뒤흔들리고 둔해져 사지가 늘어지게 되며 총기는 절뚝거린다. 혀는 길을 벗어난다. 이성은 비틀거린다.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지고 사라진다. 그러므로 영혼의 모든 본성도 분해되는 것이 당연하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中에서

에피쿠로스는 시간의 선 위에서 육체와 영혼이 함께 성장하고 함께 소멸한다고 봤다. 태어나 성장하는 시기에 육체가 성장하여 강건해지고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과 같이 영혼도 함께 성장하여 총기가 깊어지고 전성기를 맞이한다. 다 성장한 이후 죽어가는 시기에 육체가 세월의 흐름에 서서히 비틀거리다 망가지고 사라진다면 영혼도 똑같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총기를 잃다가 분해되어 사라진다. 이러한 육체와 영혼의 일체는 원자론의 기계론적 사유를 따라 죽음에 이른다. 하지만 육체와 영혼이 도착한 죽음은 인간에게 존재의 소멸을 안기는 두려움의 순간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에피쿠로스는 죽음은 삶에서 필연이라는 점을 언급하되 두려워 할 바가 없다고 말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분해되는 것은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감각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와 관계가 없다. 산 사람은 죽음이 아직 오지 않았으며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中에서

원자론을 기반으로 하는 쾌락주의는 시간의 선을 따라가는 사유를 통해 하나의 점에 도착한다. 삶에서 죽음은 필연이지만 애초에 죽음의 순간 인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죽음 직전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죽음 이후는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으니 실상 죽음은 두려워 할 필요도 없으며 애초에 삶을 살아가는 인간과는 무관하다. 시간의 선 위에서 성장과 소멸을 이어가는 인간이 가장 걱정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뿐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값지게 보낼 것이냐 뿐이다. 그리고 가장 값지게 지금 이 순간을 보내는 쾌락은 세상과 단절하여 자기 자신으로 수렴해 어떠한 동요나 혼란이 없는 영혼의 평화를 느끼는 것, 바로 아타락시아(Ataraxia)이다.


여기서 세계와의 단절은 인간이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인간 관계를 물리적‧정신적으로 끊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관계에서 오는 동요와 혼란에 흔들리지 않고 평안을 느끼며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단절이다. 감정을 쓰되 과하지 아니 하여 그저 오는 대로 받아 내고 가는 대로 흘려 보내는 것이다. 이런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동양의 노자를 보는 듯하다. 우주 전체의 관계에서 일부분에 불과한 자기 존재를 인지하고 관계에 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욕망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노자는 존재는 소박(素樸)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런 색을 물들이지 않아 흰 천(素)처럼 구별할 줄 모르고 순수하며 아무런 가공을 하지 않은 통나무처럼 겉은 투박할지언정 속은 자기 욕망에 대한 만족으로 꽉 찬 상태. 자신으로 수렴하되 세상으로 열려 있는 고요한 아타락시아의 상태는 곧 소박한 주체와 다름없다.


2. 컷으로 흐려지는 시간의 흐름

영화 <썬다운>에서 닐의 모습이 곧 아타락시아이자 소박한 주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소박한 주체이자 아타락시아에 도달한 닐의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영화의 컷(Cut) 편집이 흥미롭다. 보통 영화도 일종의 서사이기에 컷은 가장 작은 영화의 서사 단위로서 기본적으로 등장인물들이 관계를 맺는 가운데 반응하고 변화하는 것을 보인다. 이 때 컷의 사이는 순행이든 역순이든 결과적으로는 선후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배치‧편집된다. 이전 장면에서 인물들이 어떤 사건을 겪어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어떤 반응을 하였기에 현재의 장면에서 마주한 사건에 왜 그리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객이 컷 사이 시간을 메꿔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되는 것이다. 하지만 <썬다운>은 애초에 닐이 다른 인물들과 어떤 사건을 겪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기도 하거니와 나아가 컷 사이의 시간을 메꿀 생각도 없어 보인다. 하나의 장면에서 으레 보여야 하는, 다른 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닐의 반응은 거의 보이지 않거나 변화가 없다. 나아가 무감각해 보이는 닐에게 다시 다른 인물들이 자극을 줘야 할 법도 한데 장면은 그 전에 끝난다. 다음 컷은 이전 컷과 비교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호한 상태에서 시작해 서사의 중심인 무감각한 닐에게 초점을 맞춘 상태에서 다른 인물들과 어딘가 단절된 교류를 하는 닐을 보여주다 다시 이른 컷을 맞이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러한 컷의 구성과 컷 사이 알 수 없는 시간의 구멍은 죽음을 앞두고 세상과 단절되려 하는 닐의 행동을 강화한다. 영화는 쨍한 멕시코의 햇볕 밑에서 요트 위에 나뒹굴고 있는 물고기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아무런 움직임 없이 멍하니 눈을 뜨고 있는 그 물고기를 바로 다음 컷에서 닐이 뜨거운 햇볕에도 아랑곳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사랑하는 조카인 콜린(사무엘 바텀리)과 알렉사(알버틴 코팅 맥밀란 분)가 바다로 들어오라고 하지만 닐은 그저 잠시 웃고는 들어가지 않는다. 닐과 조카들은 같은 장소에 있으나 씬에서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닐은 사랑하는 여동생 앨리스(샤를로트 갱스부르 분)와 조카들과 함께 휴양지에 왔음에도 딱히 가족들과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며 휴가를 즐기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에서 닐은 가족들과 계속해서 떨어지면서 교류를 끊는다.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죽음에 모든 가족이 슬퍼하며 급히 고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 호텔을 나가기 위해 탄 오픈카에서는 닐의 시선과 가족들의 시선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있다. 공항으로 향한 버스에서도 가족들과 다른 좌석 라인에 닐만 혼자 앉아 있다.

출처. 왓챠피디아

닐이 가족과 함께 온 휴양지에서 감정적으로 교류를 거의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은 공항에서 없어지지도 않은 여권을 잃어버렸다며 가족들을 먼저 보낼 때 명백해진다. 이 순간에도 영화는 잠깐의 포옹을 제외하고는 닐과 가족들을 컷으로 분리한다. 이러한 컷은 단순히 닐과 가족 사이 감정 교류의 컷이 아니다. 컷과 컷 사이의 시간 구멍을 가족에게서 느끼는 닐의 관계와 감정으로 채워서 연결해야 하지만 영화는 계속해서 애매한 순간에 컷을 해 닐의 시간 선을 끊는다. 나아가 가족은 인간이 시간의 선 위에 서게 되는 최초의 순간부터 시간의 선 위에서 내려오는 최후의 순간까지 연결되어 있는 관계이다. 가족이라는 관계를 컷 내부와 컷 외부에서 끊어내며 영화는 시간의 선 위에 있던 닐이라는 인간의 삶을 지금 이 순간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모은다. 이렇게 시간 선이 흐트러지면서 뇌종양으로 죽음을 앞둔 닐의 삶이 현재로 초점이 모았지면서 관객은 스크린에 나타나는 닐의 순간 순간에 집중하게 된다. 닐이 그 순간에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하지 앞으로 닐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중요하지 않다.


3. 떠다니는 죽음에 대한 차분한 감정의 관조

현재로 초점이 모인 영화는 가족만이 아니라 어떤 타인에게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은 채 차분히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관계를 맺는 닐의 모습에 집중한다. 시간의 선 위에서 성장하여 소멸에 다다르는 삶에서 관계는 언제나 동요와 혼란을 일으킨다. 어제 사랑스러웠던 가족이 오늘 유산을 놓고 싸우게 될지도 모르며, 오늘 사랑을 나누는 여인은 내일 아무 관계가 아니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뇌종양으로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를 닐에게 더 이상 그런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족에게 거짓말을 하고 공항을 떠난 뒤 닐은 누가 다가오든 전혀 개의치 않고 떠나가든 붙잡지 않는다. 택시 기사가 타라고 하면 타고 호텔을 소개해준다고 하면 소개받는다. 햇볕이 쨍하니 비치면 비치는 대로 햇볕을 느끼며 바닷물이 발을 적시면 적셔지는 대로 잠을 잔다. 매일 밤 싸구려 호텔로 돌아가기 전 맥주를 사는 마트의 주인 베레너스(아주아 라리오스 분)를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기도 하다. 정확히는 베레너스와 함께 있는 그 순간에 충실하다. 그의 손을 잡고 무릎에 앉힌 채 안으며, 키스하고 섹스를 하며 충실히 사랑할 뿐이다. 차분하고 소박하게 하지만 누구보다 충실히 닐은 자신의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가족과의 관계를 끊는 컷 편집은 타인과의 관계도 끊으며 계속해서 닐의 현재로 즉, 지금 이 순간으로 관객을 소환한다. 어색하게 다가와 닐이 앉은 파라솔 밑에 앉는 택시 기사와 두 소년은 닐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것을 끝으로 컷과 함께 더 이상 관계의 진전을 위한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 베레네스의 묘한 눈길을 받다 가게를 둘러보겠냐는 베레네스의 관심에 선뜻 응하며 따라 들어가는 닐은 곧바로 다음날 다시 해변가에 멍하니 앉아 있는 닐로 이어진다. 영화는 시종일관 닐이 다른 사람을 동요와 혼란 없이 받아주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으레 보여줄 법한 관계의 그 다음을 컷으로 끊어버린다. 단순히 끊어버렸다면 닐이 관계를 맺기 시작한 사람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상상할 테지만 다음으로 나오는 닐의 모습은 별 변화도 없을 뿐더러 평화로이 햇볕을 맞고 있거나 맥주를 홀짝이며 멍하니 있을 뿐이니 관객의 상상은 이어갈 수 없다. 상상 대신 영화 전체의 톤을 차분하게 이어가는 닐의 그 순간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저 차분함이 대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기에 관객은 계속해서 닐의 순간을 함께 따라가야 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그렇게 하루 종일 해변가에서 삶의 의욕이 없다는 듯 유유자적하는 닐 주변에는 언제고 찾아올 죽음처럼 무장한 군인들이 이따금씩 보인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멕시코의 현실이면서도 모두가 내일이 없다는 듯이 먹고 마시고 노는 해변가를 무심한 듯 지나다니는 군인은 관객에게 언제고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군인만이 아니라 가족 사업인 양돈과 도축업으로 부를 쌓은 닐은 무장 강도에게 살해당한 여동생 사건으로 인해 잠시 교도소에 갇힌 이후 닐이 보게 되는 돼지의 환영은 더욱 직접적인 죽음의 표상이다. 교도소 샤워실에서 수많은 수인들이 시끄럽게 하는 데도 물을 맞으며 널부러져 있는 돼지. 배가 갈려 내장이 흘러나오고 베레네스의 집 바닥을 피로 적시고 있는 돼지. 하지만 군인과 돼지에 의해 떠오르는 죽음은 시간 선의 위에서 종말 혹은 끝으로서 찾아오는 죽음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을 계속해서 흩뜨리고 있는 <썬다운>의 컷 사이에서 군인과 돼지로 표상되는 죽음은 현재 그 순간이라는 시공간에서 함께 존재하는 죽음이다. 즉, 존재의 짝으로서 죽음이다.


이렇듯 자신의 주변을 떠나니는 죽음을 닐은 별 생각 없이 바라본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어떤 감흥을 주는 요인이 아니다. 자기 뇌에 박힌 종양처럼 항시 함께 존재하는 짝일 뿐이다. 보지 않으려 해도 보이는 죽음을 닐은 감정의 동요 없이 차분히 바라본다. 한가롭게 바람과 바다를 즐기며 먹고 마시는 쾌락으로 가득한 해변가에서 갑작스러운 총성 뒤로 피 흘리며 쓰러진 남성을 닐은 아무런 감정의 혼란 없이 바라본다. 지금 자신에게 날아온 총알이 아니었을 뿐 언제고 날아올 그 총알이 두렵지 않다. 돼지의 환영처럼 자신의 몸뚱아리도 언제고 구토를 유발할 더러운 냄새를 풍기며 내장과 피를 쏟을 것이다. 굳이 눈 앞을 떠다니는 죽음에 동요하고 혼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죽음이 임박한 지금 이 순간 무언가 남기고 가는 것이 없었으면 할 뿐이다. 병원에서 자신을 걱정하며 간호하다 잠들어버린 베레네스를 떠난 것은 죽음을 관조하던 닐이 마지막 순간에 보인 감정의 동요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남은 관계이자 자신의 삶을 다시 시간의 선 궤도로 올릴지도 모를 관계에 대한 최후의 인간적 동요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총 82분의 러닝 타임 동안 관객이 보는 죽음에 대한 닐의 관조는 예능 프로에서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류승수 배우의 명언을 떠올리게 한다. 닐과 같이 차분하니 삶을 살아가며 곁에 있는 죽음을 관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현실에서 마음의 여유를 주는 돈 즉, 자본이 많아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죽음에 대한 <썬다운>의 에피쿠로스적 관조는 돈 많은 백수여야 가능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닐의 시간을 쪼개고 감정과 관계를 끊어 삶을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게 하는 컷은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 마음의 여유를 찾아볼 수 없는 인물에게는 오히려 다른 효과를 자아냈을 것이다. 오히려 정신 없이 삶을 살아가는 인물의 모습에서 현실 속에서 비인간이 되어 가는 모습이 관객의 감정이입을 더욱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이런 관조가 계급론에 따라 특정 계급만 가능하다고 하는 비판은 영화 자체를 비판하는 것보다 <썬다운>을 경유해 현실을 비판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긴 역사에서 죽음을 피하려고 한 권력자처럼 오히려 돈이 많기 때문에 죽음을 관조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썬다운>은 그저 죽음을 관조하며 현실을 차분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을 보여줄 따름이다. 어쩌면 양돈과 도축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는 인생보다 1달이 채 안 되는 멕시코에서의 삶이 닐에게는 삶에 가장 충실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타인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정작 자신은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을 강요하지 않는 삶. 그런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선을 내려와야 하는데 과연 내려올 수 있을런지, 있다면 그것은 대체 언제일지 궁금하다. 그저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적어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후회가 남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잠시라도 자신의 삶을 그 순간에 충실히 보낼 수 있을 때 겉으로는 차분해 보일지언정 속은 후회 없이 만족으로 영글어 있을 것이다. 그런 인간의 끝은 죽음을 관조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향해 열려 있되 자기 안으로 수렴해 고요할 것이다. 의자에 걸린 채 부는 바람에 날리며 햇살을 맞고 있는 닐의 셔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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