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제도에 대한 단상
언제부턴가, (아마도 2013년 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외로움과 고립감이 나를 괴롭힌다. 돌이켜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외로움은 내 존재에 딱 달라붙어 있었던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감정이었다. 종종 나는 ‘사람들은 나를 잘 몰라’, ‘나는 사람들과 달라’하는 식의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외로웠지만 그 “다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름”은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를 구별 짓는 나의 방식이었고 그래서 나는 “다름”으로써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적당히 모범생이었던 터라 나의 유별난 생각과 행동이 대체로 수용되었고 “다름”이 존재를 위협하는 일은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운 좋게도 대체로 안전한 공간에서 안전한 사람들과 지냈다. 지금 일하는 직장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서른 중반에 들어서서야 소위 ‘세상의 쓴 맛’을 알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야 겨우 깨달은 것이지만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정상 이데올로기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 혁신의 가치를 전면에 내걸고 있지만, 일터 내부의 조직 운영 원리는 달랐다. 적어도 나 같은 어린년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다르다는 것이 존재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는, 그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나는 요구받는 정상성에 스스로를 가둬둘 수 없었다. 그건 나의 실존과 관계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 일터에서는 나를 범주 바깥으로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고 나는 어떻게든 그 안에 있으려고 발버둥쳤다. 일터를 뛰쳐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정상 범주 안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경계에서 바깥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두려움에 다시 뒷걸음치며 경계 안으로 발을 디뎠다가, 존재의 위협을 느끼면서 다시 경계 바깥을 내다보는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정상 범주 바깥으로 나갈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기꺼이 내 존재를 구겨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나의 외로움과 고립감도 함께 커졌다.
이런 나에게 필요한 건 안전한 관계였다. 모든 것을 초월하는 신적 존재로부터의 완벽한 보호가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들끼리의 정서적 교감과 연대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우정보다 깊은 존재를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가족, 내게는 그게 필요했다. 지금도 나는 가족을 찾아 헤매고 있다. 도대체 가족이 뭐길래.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다보면 고레다 히레카즈의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서로를 의지하고 아끼고 사랑한다. 다만 그들의 방식은 도덕적이지 않았고 자주 범죄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오합지졸의 사람들이 모인 무질서한 그들의 일상은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그들이 함께하는 시간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눈감고 싶어진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은 가족을 제도화했다. 대개 혼인관계를 전제로 한다. 동거와 같은 형태를 법적으로 사실혼으로 인정하든 하지 않든 그렇다. 즉 가족은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제도 안에서 인간은 보호받는다. 다른 한편 제도는 인간을 억압한다. 그리고 그 억압은 언제나 힘이 없는 편에게 향한다. 페미니즘 사회학자 케이시 윅스는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동녘, 2016)”에서 가족을 자연스럽고 낭만적인 것으로 만들어 가족 제도를 탈정치화하고 사유화하는 담론은 가족 제도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은폐한다고 주장했다. 즉 여성의 무임금 가사 및 육아 노동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남성의 임금노동은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가족 임금 개념은 남성이 돈을 벌고 그 돈을 그의 가족에게 나눠주는 방식으로 구조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제도화된 가족은 결코 탈정치적이 않으며 사회적 맥락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잭 핼버스템 같은 페미니스트들은 동성결혼을 반대하기도 한다(사실 동성 결혼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결혼제도 자체에 문제제기를 한다). 많은 동성애 커플들이 법적 테두리 바깥에 놓여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가족을 제도화하는 결혼이 애초부터 사람을 포함하는 제도가 아니라 배제하는 제도임을 강조하면서 배제를 전제로 한 결혼 제도는 확장이 아니라 해체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퀴어 커플들이 동일한 조건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결혼 제도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혼을 못할 수도 있으며, 하지 않기를 원할 수 도 있다는 점에서 차이의 정치학을 간과했다고 보는 것이다. 결혼제도를 통해서만 가족이 사회적으로 인정된다면, 결혼제도 바깥의 존재들에게는 결코 가족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결혼이라는 특정한 형태를 고수하기보다 다양한 형태의 동반자 관계에 의한 가족을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제도화하기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결혼을 통해서 획득된 가족은 온전한가. 보부아르는 “간통은 결혼의 자연스런 일부가 된다”고 한 걸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물론 낭만적 사랑의 결과로 결혼을 하고 아름다운 가족으로 평생을 살았다는 해피엔딩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어쩐지 이런 건 누구에게나 흔히 일어나는 현실이라기보다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소망은 아닐까.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결혼을 통한 가족에 대해, 그것은 아름답고 달콤하며 안전하다고 학습해왔으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평생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토록 어려운 일을 우리는 왜 굳이 애쓰면서 결혼이라는 제도에 스스로 갇히려는 걸일까. 결혼이라는 사회적 계약을 통한 가족제도가 사회를 유지하는데 어쩔 수 없이 정말 필요한 것이라면(이 주장에 별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유효기간이 있는 계약은 어떨까. 5년 만기 갱신제로 말이다.
좀 더 솔직히는 결혼이 가족제도의 중심에 놓여하는가에 대해 근본적인 의심이 있다. 제도가 보호하는 결혼관계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보호받는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된다. 실제로 그 관계가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쯤되면 아무 의미 없는 껍데기로서 결혼관계에 의한 가족제도에 속해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관계로의 진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는 감옥이 된다. 정말이지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때문인지 결혼은 영원을 전제한 관계가 된다.
나는 때때로 외롭고 고립감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정서적 친밀감을 누릴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 그리고 그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이 제도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각각의 존재들이 인식하고 상상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된 친밀한 관계가 가족으로 제도화되기를. 그렇게 이미 결정된 방식으로가 아니라 모두의 다름이 인정되기를. 그런 세계를 상상하면 조금 덜 외로워지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