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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 Aug 08. 2020

임솔아 <최선의 삶>

최악의 상황이 유일한 출구인 삶

비정상으로 내몰린 아이, 그렇지만 평범한 아이, 자신의 마음속에 불씨가 있는 아이와 제 소설이 소통하면 좋겠어요


이 소설은 열여섯의 소녀들의 이야기이다. 전민중학교에는 전민동을 중심으로 전민동에 사는 아이와 그 바깥에 사는 아이로 구분된다. 전민동에는 주로 연구단지에서 일하는 고학력자의 자녀들이 아파트에 살고 읍내동에는 그저 그런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오래된 주택이나 빌라에 산다.


강이는 읍내동에서는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빌라에 살았지만 전민중학교에서는 구별 지어지는 읍내동 아이였다. 학교는 전민동 안과 바깥으로 구분했지만, 아람과 아람의 친구들은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학교 안에서 구별 지어져 바깥으로 밀려났지만 그들은 누구든 구별 짓지 않았다. 강이가 아람과 제일 먼저 친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소영은 가출하고 돌아온 뒤에 부모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었다. 아람은 소영을 원망했다. 그렇지만 소영은 학교에서 아이들은 “소영의 편이 되어 소영과 함께 몰려다녔다. 소영은 꼭 필요한 아이였다”


아람을 보호하고 싶었던 강이는 결국 소영과 싸웠다. 그리고 더 나아지기 위한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것이 오히려 강이를 희망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병신이 되지 않으려다 상병신이 되었다. 나는 최악의 병신을 상상했다. 그것을 바라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 유일한 출구였다. 무차별하게 흙을 긁어쥐던 순간처럼, 아무 곳에도 손을 뻗을 수 없는 순간에만 그러잡을 것이 생기리라는 희망이었다 (중략) 마지막에야 찾아올 강력한 수치심을 떠올리면 짜릿했다. 수치심의 끝에서만 나는 식칼을 꺼낼 것이다. 식칼을 꺼내기 위해 더 큰 수치심이 필요했다. 회복이 불가능한 병신이 되어야 했다. (124쪽)


최악이 되는 것이  곧 최선인 강이의 이야기는 끝으로 갈수록 먹먹하고 답답해진다. 비정상으로 내몰린  열여섯 소녀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별로 없다. 작가는 자신의 악몽을 받아 적었다고 했다. 작가를 오랫동안 괴롭혔을 이 꿈이 어쩌면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 괴로워졌다.


학교라는 공간에선 사는 집, 부모의 학력과 직업, 성적, 외모 등의 온갖 것들로 너무 쉽게 구분된다. 서로가 서로를 구별 짓고 그 구별은 차별과 혐오로 이어진다. 구별하는 주체는 언제나 권력을 가진 쪽이다. 권력에 대항한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워야 하는 것이다.


강이는 아람을 지키고 싶어서 소영에게 싸움을 걸었지만 그 싸움은 이겨도 져도 안 되는 싸움이었다. 이긴다면 죽을 때까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소영과 싸워야 할 것이고 진다면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못한 존재로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싸움은 불가하다. 강이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강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때 강이가 느꼈을 수치심이 전해져 마음이 무너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낸 강이를 응원하고 싶다. 결국 강이는 소영의 병신이라는 말에 주머니 속 칼을 빼내었다. 그 사건으로 강이는 읍내동을 떠나게 되었고 소영은 대중의 응원 속에서 신인 배우가 되었다.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강이와 소영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좋았을까, 그렇지만 그것이 두렵기도 했을 것 같다. 강이의 반려견 강이가 눈을 좋아하면서도 이상하고 무섭고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강이가 스노우볼 속의 눈을 보면서 가짜로 살기보다 두렵고 이상하고 무섭지만 진짜 함박눈을 맞으면서 죽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기를 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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