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주의보
주말에 약속이 없어 집에 있는 날이면, 엄마의 잔소리 세례가 이어진다. "이불 갤 때 창문 좀 열고 개!" "책상이 이게 뭐니? 정리 좀 해라!" "머리 말렸으면 머리카락 좀 주워!" "옷걸이에 옷 좀 똑바로 갤 수 없니!" 등등. 지면에는 느낌표 하나로 처리했지만, 실제 엄마의 잔소리는 느낌표 10개가 뒤따라 오는 느낌이다. 대개 정리정돈을 잘하지 못하고 게으른 나의 행동반경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 나름대로는 사정이 있지만, 엄마에게 그 항변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 아. 물론 나도 가끔은 어질러져 있는 책상과 제멋대로 옷이 걸려 있는 옷걸이를 볼 때면 한숨이 난다. 하지만 귀찮은 건 어쩔 수 없다. 이 귀차니즘은 대체 누구에게 물려받은 것인지.
언젠가 이런 적도 있었다. 늦은 밤에 알바를 끝나고 집에 온 날. 화장도 말끔하게 지우고 모처럼 팩을 얼굴에 붙이고 방바닥에 누웠다. 푹신한 이불이 주는 촉감에 정신을 못 차리던 차에 방 스위치를 끄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다. 다시 불을 끄러 일어나기엔 너무 귀찮고, 그렇다고 불을 환하게 켜놓고 자면 다음 날 들을 엄마의 잔소리가 뻔히 그려지고. 그래서 난 잔머리를 썼다. 자리에서 누운 채로 발가락으로 서랍을 열어 집어 던지기 좋은 물건들을 몇 개 골라 스위치를 향해 마구잡이로 던졌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방 조명이 꺼졌다. 후훗. 손과 발로만 이룬 쾌거. 아무튼 이 정도로 귀차니즘이 심할 때도 있었다.
이런 나에게 만년필은 너무나도 귀찮은 도구다. 만년필은 똑딱 버튼만 누르면 심이 튀어나오고 잉크를 다 쓰면 쿨하게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리면 되는 일반 볼펜과는 다르다. 만년필 잉크를 수시로 채워주거나 카트리지를 갈아줘야 하고 펜촉이 많이 달지는 않았는지 체크도 해야 한다. 그리고 일정 기간 동안 만년필을 사용하지 않으면 한동안 잉크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만년필의 매력에 푹 빠졌지만 잉크 채우기가 귀찮아 겨우 길들여 놓은 만년필을 한동안 멀리하기까지 한 적도 있다. 나와는 도저히 친해질 수 없는 필기구라 생각했지만, 귀차니즘을 이기고 잉크를 채우면 만년필만 한 것이 없다. 일단 만년필은 특별하다. 내가 어떻게 만년필을 쥐고 글씨를 쓰느냐에 따라 펜촉이 내가 쓰기 좋은 최적의 상태로 맞춰진다. '보통 '길들인다'고 말한다. 글씨를 꾹꾹 눌러 쓰는 사람의 만년필의 펜촉은 뭉툭하게 변하고, 힘을 주지 않는 사람의 만년필의 펜촉은 시간이 지나도 날렵하다. 미끄러지는 듯 써지는 만년필의 필기감도 말하면 입 아플 정도. 만년필의 필기감을 한 번 느끼면 일반 펜의 비루한 필기감으로는 도저히 글을 쓰고 싶지 않아지기까지 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알림장에 적힌 '내일의 준비물'을 단 한 번도 전날 밤에 챙기는 법이 없던 '귀차니즘의 대가'가 만년필을 손에 쥐고, 글 더미에 파묻혀 살고 있다니. 세상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