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주의보
세상엔 많은 종류의 즐거움이 있지만, 내 삶에선 '먹는 즐거움'도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기분이 꿀꿀할 때 맛있는 음식을 한입 먹으면 금세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어쩌다 맛없는 음식을 먹거나 배가 고프면 몹시 기분이 언짢아지기도 한다. 친구는 내가 기분이 가라앉으면 '배고파서 그런 거'라며 옆에서 깐족거리며 놀리곤 한다. 처음엔 부인했지만 한껏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언제 기분이 안 좋았냐는 듯 기분이 좋아지는 거 보면 반박할 말이 없어진다.
난 맛집 책을 주로 내는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회사 일 때문에 1년 넘게 홍대 앞의 맛집을 꾸준히 취재할 일이 있었다. 하루에 적게는 대여섯 곳부터 많으면 일고여덟 곳의 맛집과 카페, 술집을 돌아다니며 익명으로 취재를 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는 평일, 혼자 홍대 앞의 식당들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참 음식을 많이도 먹었다. 요즘도 홍대 앞에서 인기를 끄는 스테이크 전문점에 가서 혼자 야무지게 스테이크를 썰고 데이트하기 딱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맥주와 함께 파스타를 먹었다. '몇 분이세요?' 라는 직원의 말에 쭈뼛거리지 않고 '1명이요'라고 말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 어느새 혼자 취재를 가고 밥을 먹는 일에 익숙해졌다. 언젠간 이런 적도 있었다. 와인바나 술집 같은 곳은 혼자 가기 그러니까 같이 취재를 하는 편집자 분과 저녁에 만나 같이 찾아가곤 했는데, 그날은 취재해야 할 곳이 많아서 부득이하게 혼자 술집 한 군데를 찾아가야 했다. 그곳은 '해물 포차'. 그달 기사의 주제가 제철을 맞은 '멍게' 요리 전문점이었던지라 그곳에서 꼭 찍어야 하는 사진은 멍게였다.
"몇 분이세요?"
"아… 저기 한 명인데요."
나도 모르게 작아진 목소리. 내 말에 직원들이 더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가게 구석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는 척하다가 주문을 했다.
"저기 멍게 한 접시랑요… 청하 한 병 주세요"
손질이 오래 걸리지 않는 요리인지라 특유의 향을 물씬 풍기는 멍게 한 접시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직원의 말.
"어유. 멍게 좋아하시나 봐요. 혼자서 소주에 멍게를…"
"아. 그러게요. 하하"
직원도, 나도 서로 민망했던 대화. 오독오독 멍게를 씹으며 청하를 한 잔씩 따라 술을 먹기 시작했다. 대충 먹고 가려고 했는데, 오랜만에 먹는 멍게가 또 왜 이렇게 맛있는지. 해물이랑 소주의 궁합이 좋다는 걸 또 깨달았다. 청하도 술술 목구멍에 들어가고. 옆에서 쳐다보는 시선, 왜 안 느껴졌겠느냐만, '난 지금 일하는 중이다. 비록 청승맞은 비련의 여주인공 코스프레처럼 보이겠지만 난 괜찮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멍게 반 접시를 뚝딱 비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자리를 뜨려 하는데, 직원 분이 남은 멍게를 포장해주겠다며 바리바리 싸주었다. 참으로 친절하기도 하시지.
숱하게 많은 맛집을 일 년 넘게 돌아다니면서 맛있는 음식들을 먹다 보니 자연스레 입만 엄청 높아졌다. 세상에 이렇게나 먹을 음식이 많고 맛도 천지 차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몸소 체험한 것이다. 진하디 진한(사람에 따라서는 짜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본 라멘, 너무나도 좋아하는 봉골레파스타, 초콜릿이 콕콕 박혀있는 팽오쇼콜라와 달콤한 크림이 듬뿍 들어간 에클레르 등등. 예전에는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나가기 귀찮아서 먹는 것을 포기한 적이 많았는데, 요즘은 집에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인데도 먹고 싶은 빵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서는 수고도 마다치 않는다. 귀차니즘을 이기게 하는 음식의 힘이라니!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돼지런하다'라는 말이 종종 쓰이는 모습을 봤다. '돼지+부지런하다'를 뜻하는 신조어인 모양인데, "족발을 먹으려고 부산까지 가다니. 넌 참 돼지런하구나" 이런 식의 용례로 쓰인다고. 이 말을 보고 한참이나 실실 웃었다. 다른 일엔 한없이 귀찮아하지만 음식 앞에선 이리저리 부산 떨고 부지런한 나. 이 글을 쓰고 나면 또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나갈 예정이다. 내가 번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그 작은 사치가 소소하지만 참 행복한 순간이다. 이번 주말도 돼지런한 삶으로 마무리하는구나.
- 2017년의 덧붙임: 책을 읽어주셨던 분들이 많이들 좋아해주셨던 글. 여전히 난 돼지런하며 돈 버는 족족 먹는 일에 쏟아붓는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