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과 향으로 즐기는 중부 프랑스의 여름
프랑스의 여름에 흠뻑 빠졌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중부 프랑스 시골 마을의 자연과 통했다고 할까요. 장마 후에 뜨거운 태양을 맞게 되는 한국의 여름과 달리, 이곳의 여름은 파란 하늘에 햇볕이 쨍쨍 내리쬐다가, 순식간에 하늘이 어두워지고 빗줄기가 굵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곤 몇 분만에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을 다시 볼 수도 있어요. 그래서인지 산책을 나서려는데 비가 내려도 여유를 갖고 기다릴 수 있네요.
그렇게 기다렸다 혼자 산책을 나섰습니다.
함께 하는 산책도 좋지만, 혼자 하는 산책이야말로 이리저리 거닐며 생각을 정리해 본다는 취지에 잘 맞는 것 같아요. 특히 온갖 소음과 간판들로 가득 찬 도시가 아닌 푸르른 들판과 숲이 끝없이 펼쳐지고, 바람 소리와 저 멀리 소울음소리만 들려오는 이곳에서는 발 닿는 대로 걷다 산책멍에 빠져들기 아주 좋습니다.
음...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지?
좀 전에 비가 내려 공기도 흙도 모두 촉촉하게 젖어 있는데요. 어디선가 실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더니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습니다. 꽃향기도 아니고 나무 냄새도 아닌 것이, 어디서 나는 냄새일까 싶어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녔어요. 그리고 왼쪽 어느 나무로 가까이 가니 그 냄새가 진해졌는데요.
바로 설익은 무화과 열매의 향기였어요.
무르고 진득한, 농익은 늦여름의 무화과와 달리 아직은 푸르고 단단한 열매들이 풍기는 향기는 달랐습니다. 달콤하지만 풀 냄새 같은 쌉싸름한 향기도 났다가, 두 향이 어우러져 정신을 깨워주는 상큼함이 콧속을 거쳐 머리로 전해지더군요. 그래서 가까운 가지에 달린 무화과 열매에 코를 박고 킁킁거려 봤지만 그 향기가 더 진해지진 않았습니다. 가지를 놓아주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요.
그때 또 다른 냄새가 코끝을 찔렀습니다.
익숙한 소나무 또는 전나무 냄새 같았는데요. 비 온 뒤 촉촉함이 더해져 풍부하게 느껴졌어요. 저는 달콤한 향을 좋아하는 편이라 향수나 방향제로 솔향이나 우디향을 선호하진 않아요. 그런데 숲 속에서 풍기는 나무 냄새는 어떤 향수나 방향제보다도 마음에 들었답니다. 살짝 무겁고 씁쓸한 향인데 단맛이 나는 듯도 했고, 따뜻하게 나를 감싸는 느낌이었어요. 자연의 향은 이토록 다채롭구나. 인간이 따라 만든 향은 그중 가장 강한 하나를 따라 하는 거구나 싶었답니다.
걸음걸음 다른 향이 가득 찬 숲길을 따라 걸었어요.
타임, 로즈메리, 바질까지 손을 뻗어 따기만 하면 됐는데요. 그 외에도 분명 더 많은 허브와 열매, 꽃들이 있었을 텐데 제가 모르고 지나쳤을 걸 생각하면 아쉽네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입니다. 시험을 위한 공부 말고, 내 삶의 하루하루를 풍부하게 할 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렇게 향에 취해 앞뒤 없는 사유를 계속하며 길을 걸었네요.
그리고 숲길 끝에서 두 눈이 밝아졌습니다.
산책길이 끝나고 제 두 눈앞에 푸른 하늘 아래 더 푸른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넓은 언덕이 펼쳐졌거든요. 이럴 수가, 이곳을 내가 이제야 왔다니, 뭘 한 거지? 하는 생각도 잠시, 그저 자연에 취해 내려다보기만 했습니다. 마치 개안한 듯이, 제 눈은 어느 때보다 맑아졌어요. 어떤 인공눈물을 넣어도 이런 느낌은 없을 거예요.
이렇듯 자연은 힘이 있습니다.
눈을 밝혀 더 멀리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향기로 콧속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맑게 해 주죠. 이 느낌을 이제야, 프랑스 중부 시골까지 와서 알았다는 건 참 안타까워요. 물론 한국에서도 이런 곳이 있는데 못가 본 것이겠죠. 확실한 것은, 이 힘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에서 더 크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그리고 만물이 한껏 성장하는 여름에 더욱 우리 가까이 다가오죠.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