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 너머에 있는 더 지고한 선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
정말 알고 있나요?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행복은 이런 것이고, 불행은 저런 것이다라고 이미 정해져 있고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인과 악인 또한 특정 행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해지고자 행복해지고자 노력했고, 악한 사람을 비난하고, 불행을 최대한 회피하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행복은 가지려고 노력한다고 내 것이 되지 않고, 불행을 회피하려고 할수록 내 앞에 더 자주 나타났습니다. 내가 악한 것이라 정의 내리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나의 선이 다른 사람에게 선이 될 수 없는 경우도 종종 봐왔습니다. 그래서 이 모두가 나의 불행이며, 그 불행을 겪지 않는 이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 여겨 부러워했습니다. 그렇게 더 불행해졌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느낄 때, 당신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평화롭게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슬프고 눈물이 나겠지만 저항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그 슬픔 아래서 깊은 평화와 고요, 그리고 신성한 현존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의 발산이고 내면의 평화이며 대립이 없는 선(善)입니다.
다시 한번 삶의 목표가 '행복'이거나 내가 '옳다'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게 존재하기, 현존하기라는 것을 마음에 새깁니다. 톨레의 설명대로라면 "행복은 우리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인식하는 조건에 따르지만, 내면의 평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힘듦, 어려움, 아픔, 슬픔, 고통을 저항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면 '그걸 어떻게 해?' 하고 또 저항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몸에 힘을 빼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줄어드는 것처럼, 불면증에 시달릴 때 더 이상 자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처럼 저항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으면 오히려 조금 쉬워집니다.
운명의 무늬가 어떻게 엮어지든 다가오는 것은 모두 받아들여라. 이 세상에 당신의 욕심을
완전하게 채워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2,000년 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이렇게 말했다고 하고요. 톨레는 <기적 수업>의 내용도 인용하며 내면의 저항이 어떻게 불행으로 연결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불행해질 때마다 마음을 잘 살펴보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 바로 불행이다. 불행한 마음자리에는 항상 그런 무의식적인 믿음이 깔려 있다." - <기적 수업> 중에서
우리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삶은 완벽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잘못된 전제에서 시작된 믿음을 하루빨리 버리는 것이 나의 불행이 더 커지는 것을 막고 그 반대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