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가 얇은 사람의 낮과 밤

세상의 주파수를 끄지 못하는 뇌의 피곤한 굴레

by GALAXY IN EUROPE

어젯밤 꿈을 꿨다.

멀리서 무리 지어 쉬고 있는 호랑이들을 구경하는 중에 한 마리가 갑자기 나를 덮쳤다. 순식간에 다가와 거대한 앞발을 날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쪽 손목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아냈다. 번쩍 눈을 떴을 때, 묵직한 앞발이 닿았던 손목의 뻐근함이 어둠 속에서도 너무나 생생했다. 이렇듯 나의 수면은 종종 고요함과는 거리가 먼, 스펙터클, 판타지, 액션 드라마일 때가 많았다. 어린 시절엔 눈을 감은 채 집 안을 돌아다니거나 갑자기 책을 펴 읽던 몽유병으로 함께 방을 쓰던 언니 잠을 깨웠고, 어른이 되어서는 붉은 조명아래 벌거벗은 사람들이 엉켜 있는 컬러풀한 꿈, 중력 없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다니는 꿈, 남자친구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가슴 아픈 이별에 가슴이 저린 꿈을 꾸며 그 강렬한 감각에 놀라 깨곤 했다. 오열하며 펑펑 쏟아지는 눈물에 잠을 깨기도 하고, 옆방에서 주무시던 엄마가 내 오열에 놀라 달려오시기도 했다.

사진: Unsplash의 Evi T.

미국의 정신의학자 어니스트 하트만(Ernest Hartmann)은 이토록 스펙터클한 밤들을 '얇은 경계(Thin Boundaries)'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는 막이 있는데, 이 막이 얇은 사람들은 수면과 각성의 경계가 느슨해 꿈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감각하고, 무의식의 이미지들이 댐이 무너진 듯 필터 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나의 그 강렬하고 역동적인 밤의 세계는 결국, 내면의 경계선이 유독 얇은 탓에 빚어진 현상이었다.


문제는...

날이 밝고 일상으로 돌아와도 나와 타인, 나와 세상 사이의 막은 여전히 얇다. 일상에서 사람들과 마주할 때, 나는 상대방의 작은 움직임, 스쳐 지나가는 눈짓, 무심코 선택한 단어나 말투의 미세한 높낮이만으로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현재의 기분, 나아가 그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절로 파악된다. 누군가의 주파수가 내 안으로 훅 밀려 들어오는 이 감각은, 내가 원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고성능 안테나가 항상 켜져 있는 것처럼, 내 눈에 보이고 느껴지기 때문에 외면할 수 없는 본능에 가깝다.

사진: Unsplash의 Kevin Kandlbinder

그렇게 타인의 니즈를 감각적으로 읽어내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 움직이게 된다. 몰랐다면 모를까, 안 보인다면 괜찮았겠지만 '못 본 척'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때 충족시켜 주었을 때 찾아오는 보람도 분명 있다. 하지만 상대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미리 알고 무언가를 건네거나 챙겨주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은 내 기대와 다를 때가 많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요청하지도 않은 것을 꿰뚫어 본 상황에 오히려 묘한 불편함을 느끼고, 어떤 이들은 몇 번의 배려가 반복되면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자신의 권리로 여기기도 한다. 내가 읽어낸 감각의 결과가 오히려 관계의 짐이 되어 돌아오면 나는 어느 순간 뚝, 거리를 두어 버렸던 듯하다. 좋아서 온 힘을 다해 다가갔다가, 방전되어 황급히 뒷걸음질 치는 셈이다. 나의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와 거리 두기에 상대방은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하고, 그런 패턴을 반복하는 나 자신에게도 허탈감이 찾아온다.


여러 사람들 속에 섞여 내 몫을 해내야 하는 매일의 삶은, 이 예민한 수신기를 달고 살아가는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버거운 일이다. 이것은 상대방이 나쁜 것도, 어떤 상황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저 세상의 자극을 남들보다 몇 배는 증폭해서 받아들이는 나의 생물학적 기질일 뿐이다. 이 피곤한 안테나의 전원을 내 마음대로 뽑아버릴 수는 없다. 그저 오늘처럼 타인의 기운에 속수무책으로 에너지가 빨려버린 날이면,


아, 오늘도 내 얇은 경계가
너무 많은 것을 흡수해 버렸구나


하고 서늘하게 나의 상태를 직시할 뿐이다.

사진: Unsplash의 Jessica Weiller


[ 표지 사진: UnsplashAdam Borkowsk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