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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라 Sep 28. 2022

인문학의 고고함에 대한 환상

교수들의 비도덕을 마주하며 인문학을 성찰하다    

대학교에 와서야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나는 학부부터 석사과정인 지금까지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나와 같이 취업하는 것보다 학문을 하고 그 안에서 발전하는 것을 더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아마 공감할 것인데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며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 특히나 나의 전공인 인문학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은 길을 우직하게 걸어오기란 쉽지 않아 학생들은 그 길을 먼저 가고 나름의 직함까지 가진 '교수들'에게 존경심을 품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쉽지 않고, 넘어야 될 산들이 더 많이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그들에게 존경심을 가졌던 건 인간의 삶과 사회에 깊이 고민을 하고 그것을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다해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보려는 그 신념으로 공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언뜻 돈이나 성공을 쫓는 사회에서 마치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것처럼 아주 고고해 보였다. 


그러나 대학교에 조금 머물러 보니 나는 내가 생각했던 그 고고함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인문학은 수많은 성찰과 비판으로 풍요로워져도 그것을 주도하는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들려오는 소문에 귀기울이거나 학교에서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는 편이 아닌데도 지난 몇 년간 누군가의 부정과 탐욕과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들린다. 수면 위에 떠오르는 것이 이 정도라면 떠오르지 않아 잠겨 있는 것들은, 아직 옮겨지지 않은 사정들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고 싶지도 않을 지경이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면 윤리나 도덕, 즉 '올바름'에 대한 것이 무엇인지 매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수많은 논의가 이루어지지만 '옳은 것'의 틀은 존재한다. 비단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도덕에 대해 실험실의 현미경은 아니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누군가의 글에 더 미세한 현미경을 들이대는 학자들이 어린아이가 봐도 잘못했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학교와 학교 바깥에서 행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동시에 두려웠다. 그들에게 공부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싶어서였다. 인간과 사회를 이롭게 해 줄 수 있는 (혹은 그렇게 믿은) 공부가 정작 그들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면, 애초에 그 공부와 연구는 실패가 아닌가? 이론적으로 훌륭하다고 해도 그것은 폐기해 버려야 한다. 


나는 여기서 모든 학자들, 인문학자들을 일반화하며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모두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며 열에 여덟 사람은 누구보다 도덕적이고 올바름을 외치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잘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거 아니었나.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솔직한 말로 그들에게, 그리고 나와 우리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올바름을 외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때로는 본인의 잘못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나도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어쩌면 그들이 했던 공부 자체가 문제였던 게 아닐까? 자신이 이룩한 학문의 발전과 성취가 도리어 공부하는 자신의 실제적인 삶과는 분리시키는 일을 낳은 것이 아닐까 묻게 된다. 학문에서 당연하도록 외쳐지는 '인권'과 '도덕'이라는 단어는 철저하고도 고고한 개념이 되면, 그것은 삶과 아주 자연스럽게 분리가 된다. 선과 악, 양심과 비양심, 감정과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뇌하고 선택하며 분투하는 일상인 삶에서. 


우리는 전과자나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살인보다 목사, 경찰, 교수의 횡령이나 폭력에 더 놀라고 분개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과자나 정신병자보다 더 도덕적이고 작은 부도덕에도 민감할 것이라는 믿음은 아주 놀랍도록 자주 우리를 배신한다. 그런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오히려 그들의 '직업적 도덕성'이 그들을 실제 삶과의 위험한 분리 속으로 몰아넣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사이비 교주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고마운 것은 그들을 통해 학문하는 사람의 고고함에 대한 환상을 깰 수 있었고, 오히려 공부가 나를 실제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삶과 괴리시킬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준 일일 것이다. 요리를 배우면 아마추어 요리사라도 되고, 목공을 배우면 의자 다리 정도는 고칠 수 있을 텐데, 도덕을 공부한다고 도덕성이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그들이 머리 굴리는 대신 육체를 쓰고 기술을 배웠더라면 결과는 달랐을까?).


도덕과 올바름의 법칙들을 공부하고 연구한다고 해서 내가 그 이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상과 높은 도덕과 평등과 조화라는 추상명사들이 흰 종이 위에서 고고하게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볼 때에도 진짜 나는 그 속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나는 오후 1시가 넘으면 배고파하고 누군가의 무심에 쉽게 분노하며 감정과 기질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높고자 하는 자가 도리어 종이 되어야 한다"*는, 가장 낮은 자가 높은 자라는 역설이 진실을 나타내 주고 있다고 믿는다. 



*마태복음 20장 26-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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