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단절의 공간
1. 불명예스러운 단절의 공간
더 이상은 떨어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형들에게 배신당해 구덩이에 떨어지고, 이집트인의 노예로 팔려 한순간에 종살이를 할 때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강간미수라는 억울할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누명까지 뒤집어쓰고서, 보디발의 집에서 좋은 것을 먹고 마시며 나름대로 편한 잠자리에서 쉬던 요셉은 이제 그 집의 가장 낮은 곳으로까지 떨어졌다. 나는 한 번도 물리적인 감옥에 갇혀본 적은 없지만,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심경은 상상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세상과는 철저히 단절된 공간, 무언가 죄명을 가지고 그곳에 들어와 있는 한은 수치스러운 낙인을 가지고 지내야 하는 공간, 주는 대로 먹을 수 있을 뿐이면서 날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 밖에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곳이다.
만약 이 모든 것에서 요셉에게 조금이라도 꼬투리를 잡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렇다면 그의 불행을 어느 정도 정당화할 수 있을 텐데, 아직까지는 그의 불행을 정당화할 어떠한 중대한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다. 요셉은 여기까지, 무력하게 끌려오기만 한다.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에 대해 말할 기회조차 감히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끌려가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나 요셉에게 감옥은 그저 무력하게 신세한탄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곳이 아니었다. 여기서 다시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요셉이 이집트로 끌려올 때까지는 어떤 말씀도 등장도 하지 않으시다가, 그가 보디발의 집에 갔을 때 갑자기 요셉과 함께함을 드러내셔서 그를 형통하게 해 주었던 바로 그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역시 이번에도 똑같았다. 요셉이 못된 여자에게 억울한 일을 당할 때까지는 별 말씀 없으시다가 그가 감옥에 가자 "요셉과 함께하셨고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다"(창 29:21)고 하신다.
요셉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고 그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요셉을 간수의 마음에 들게 하셨습니다. 간수는 요셉에게 감옥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다 맡겼습니다. 간수는 요셉이 맡은 모든 것에 대해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셔서 그가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 39:21-23)
하나님은 시간을 조금 전으로 돌려서, 바로 그 일이 일어나기 전 요셉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는 없었는지 의문이지만, 우선은 이야기를 따라가자. 하나님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처럼 감옥에서도 요셉이 간수의 마음에 들게 하셔서 요셉이 그곳의 관리인이 되도록 하신다. 간수는 보디발이 그랬던 것처럼 요셉이 하는 어떤 일도 간섭하지 않는다. 요셉이 맡은 일은 요셉이 전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높낮이를 넘어선 하나님의 통치와 일하심
감옥이라는 공간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 수 있게 된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곳은 곧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되며 그 통치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인 요셉은 비록 감옥 안에서는 죄인 신분이었지만, 관리인이 된다. 감옥의 간수는 보디발이 그랬듯이 요셉에게 모든 일을 다 맡겼다. 그곳을 통제하는 힘은 간수에게 있었지만, 감옥의 실무자는 요셉이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일은 모든 곳의 높낮이와 중요성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가장 낮고 비천한 곳인 감옥에서도 나타났다. 이후 우리는 요셉이 총리로서 이집트의 2인자로 우뚝 선 것을 보겠지만 사실 하나님께 있어서 감옥이든 궁궐이든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에게 힘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곳을 보시고 통치하시고 모든 공간을 넘나들어 손대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분은 예수님과 같은 성품으로,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 더 주목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도 요셉이 일하도록 하시고 무언가를 배우도록 하셨다. 무엇보다 관리하고 다스리는 영적인 권위를 주심으로써 통치의 일을 배우도록 하셨다. 요셉이 총리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보디발의 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께 다루어지고 만들어진 사람이라면 어느 자리에 있든지 형통하다. 그리고 감옥과 같이 가장 낮은 곳에서조차 하나님에게로부터 주어진 권위를 갖게 된다. 요셉은 자신이 거한 곳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웠다. 감옥에 떨어진 억울함과 슬픔으로 괴로운 때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결백함을 알았다. 그리고 하나님도 아시리라 여겼다. 수많은 이해되지 않는 밤과 괴로움과 절망의 골짜기를 지났겠지만, 그 시간을 통해 요셉은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3.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거해 있는 곳 어디든지
때로는 "이 곳에 아무래도 잘못 왔어"라는 마음이 드는 때가 있다. 나의 경우에도 그랬다. '왜 이런 가정에서', '왜 이런 학교에서', 그리고 '왜 이런 나라에서'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남들이 사는 삶이 더 좋아 보이고, 내가 사는 삶은 어떤 것보다도 볼품없거나, 부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요셉의 삶을 보니 그러한 생각과 비교 자체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기에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있느냐'나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느냐'였다.
요셉의 이 같은 삶은 오늘의 나에게도 분명히 말하는 바가 있다. 작년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는 곧바로 해외로 가고 싶었다. 20대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열방에서의 은혜가 너무 컸고, 특히나 내가 졸업하자마자 다녀온 나라에서 꼭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잘 몰랐다. 졸업을 했으니 경제적인 수입이 필요했기에 일단 이곳 저곳 이력서를 넣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프리랜서를 지원했던 회사에서 내근직으로 일할 의향이 있는가 하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지방에 살고 있었고 회사는 서울에 있었다. 나는 뜻 모를 인도하심으로 서울에 이사를 오게 됐고, 지금은 벌써 그 회사에서 일하게 된 지 2년이 되어간다. 지난 2년간, 내가 생각하지 않은 길을 내시고, 서울에서는 혈혈단신인 내게 어려울 수 밖에 없었던 경제적 문제와 집 문제, 교회 공동체를 찾는 일도 평안히 해결해주셨다. 벌써 2년이나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어떻게 이럴 수 있었는지 새삼 신기하다고 느낀다. 내가 생각했던 곳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분명히 그분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곳이다. 하나님은 내게 그것을 알려 주시려고 내가 구하지도 않고 꿈꿔보지도 않은 곳으로 나를 인도하셨고, 모든 걸음을 주관하셨다.
지금 처한 삶이, 거해 있는 곳이 "내 계획과 의도대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동행과 은혜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앞서 말한 사람보다 세상적으로는 부족해 보이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바로 내 이야기다) 결국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기에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이, 결코 내가 나를 인도한 곳이 아니라면 지금 그분의 모든 선하신 뜻 가운데 무언가가 내 삶에, 그리고 그분의 뜻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으니 의심 말고 그분을 따라가는 인생 되기를 소망한다.
그럼에도, 내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전부 이해한 건 아니었다. 나는 열방에 가고 싶었다. 조금 부족하게 살아도 괜찮으니 내가 먹고살 정도로 일을 할 수 있으면서도 복음 전하는 자로 살고 싶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출퇴근길 꽉 막힌 지하철에 갇혀 고단한 사람들을 가끔 상대해내고, 밀려드는 일들 가운데 피폐해져갔다. 퇴근하고 돌아와 지친 마음을 함께 나누고 달랠 가까운 친구나 가족도 없었다. 그렇다면 더욱더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했어야 하는데, 내게는 마치 그 시간이, 하나님이 나를 잊은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