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답이 아님을
“어떠셨어요? ”
“잘 지냈어요.”
의사 선생님은 처방해 준 약은 잘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물었고 그렇다고 했다.
“시댁에서 연락이 안 왔나 봐요.”
“네.”
“그럼 생각은 하셨나요? ”
“어.. 아니요. 생각이 안 났어요.”
“그럼 자극이 없어서 잘 지낸 거네요. 발작버튼이 안 눌린..”
“네. 그렇네요. ”
의사 선생님은 나를 봤다 모니터를 봤다 하며 타닥타닥타닥 무언가를 열심히 입력했다.
“다시 연락이 오거나 그러면.. ”
“어.. 싫을 것 같아요. ”
“그렇죠. 싫죠. 너무나도 당연한 감정이에요.”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런 대화에서 무엇을 입력할 수 있을까. 바삐 움직이는 키보드 소리가 내용을 궁금하게 했다.
“환자분은 다른 사람들하고 지내는 데는 문제가 없는 걸로 나오는데 발작버튼이 눌린다고 표현하신 시댁에만 그렇네요. 환자분 성격을 알아야 더 의미 있는 상담이 될 것 같아요. 성격검사 링크를 메시지로 보내드릴 테니 집에 가셔서 하시면 되고 완료되면 병원으로 오거든요. 그럼 제가 그거 보고 다음 주 상담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안녕히 계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검사의 연속이군. 사실 육지에 살 때 5년 전부터 심리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았다가 일하기 시작하면서 조금 더 효율적인 약물치료를 할 수 있는 정신과를 추천해 주셔서 다니다 입도했다. 상담을 시작할 때 내가 해당되는 검사는 다 했으므로 새롭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검사문항들 중에는 눈에 익는 문구들이 많이 있었다. 특별한 게 나오겠나 싶지만, 성격을 알아야 시댁 발작버튼의 원인을 알 수 있다고 하니 귀찮지만 또 해야 했다.
생각해 보니 인생에서 발작버튼은 시댁이 처음은 아니었다. 10대 때는 큰 외숙모에게 발작버튼이 있었다. 사실 우리는 좋은 사이였다. 나는 아홉 살 때 큰 외삼촌댁에서 일 년 동안 얹혀 살았다. 큰 외삼촌 댁에는 나와 동갑인 남자아이와 세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남자아이하고는 소꿉친구이자 사촌이자 가족이었다. 큰 외숙모는 옷을 살 때도 외식을 할 때도 자신의 아이들과 나를 차별 없이 대했다. 엄마 없는 서러움은 밤마다 몰려오는 그리움뿐이었다. 분명 그녀는 나에게 엄마가 없을 때 엄마의 정을 느끼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고등학교에 가면서부터 외숙모는 나를 세모난 눈으로 보았고 말로 상처를 많이 주었다. 외갓집에서 울보에 성깔 있는 캐릭터였던 나는 성격으로 공격을 많이 받았다.
고3 때의 기억이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만난 외숙모는 예배가 다 끝나고 나가는 길에 뒤에 앉아있던 나의 가방의 지퍼를 열고 뒤집어엎어 놓고는 “담배가 없네?”라고 교회사람들이 다 듣게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옆에는 오빠만 있었다. 엄마는 교회에 충성을 다하는 권사님이었으므로 교회업무를 보고 있었다. 오빠는 “숙모 왜 남의 가방을 뒤지고 그래. 이상하네. 참.”이라고 했고 “너는 동생이 바른길로 가는지 봐주는 것 가지고 왜 그러냐. ”라고 했다. 누가 봐도 바른길로 인도하기는 커녕 담배피는 고삐리로 몰아가 망신주고 싶은 행동이었다.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던 나는 담배를 피우는 학생처럼 되어버렸다. 당시 나는 교회를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교인들이 나를 담배 피는 학생으로 오해해도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가방을 함부로 뒤지는 행동은 너무도 무례했고 화가 났지만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오후에 엄마에게 말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계속 사람의 신경을 긁어대는 큰 외숙모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무반응으로 일관했었는데, 그것도 못마땅했는지 큰 외숙모는 같이 사는 외할머니에게 나에 대해 이상한 고자질을 했다. 외할머니는 일요일에 영어과외를 다녀와 늦은 점심을 먹는 나에게 “공부만 잘하면 뭐 하냐. 인간이 돼야지. 어른이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말이야. 싸가지 없게 커서 어떡할래.”라고 말해서 울면서 밥 먹는 일도 있었다.
그 이후 큰 외숙모와 한패가 되어 외할머니도 나를 세모난 눈으로 보았다. 교회에서 예배가 끝나면 큰 외숙모 차에 올라타면서 “쟤 싸가지 없이 커서 어떡하냐”를 기도문 외우듯 하는 할머니를 배웅하며 엄마는 “아잇 진짜. 잘 가르칠게요. 들어가셔요. ” 라고만 하고 외숙모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외갓집에는 가지도 않았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말보다는 눈물이 더 먼저 나와서 울보라는 비아냥을 살 게 뻔했다. 그들은 남의 말을 들을 능력이 없었으므로 일방적인 비난에만 능했다. 그렇게 나는 10대 끝자락에서 수도 없는 복수를 꿈꿨으며 그들이 모를 분노를 뿜어댔다.
그렇게 나는 20대가 되었다. 아물지 않는 상처로 아파했고 그 아픔에 내 일상은 점점 무너졌다. 그렇게 관계 트라우마를 떠안고 끙끙대고 있으니 다른 관계들도 좋았을 리가 없었다. 관계에서 불편함은 잘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점점 관계를 맺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괜찮을 척을 해보려던 시절도 있었다. 뚝딱 거리고 잘 되지 않기도 했지만 에너지가 너무 소진되어 다음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답답해했고 바보라고 했다. 그들은 너한테 그렇게 한 거 기억도 못하고 있을 텐데 너만 이렇게 사는 게 억울하지도 않냐고도 했다. 맞다. 너무나도 억울했다. 그런데 잘 안 됐다. 당시에는. 그러나 지금은 안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것을. 큰 외숙모가 씻겨주던 아홉 살의 나는 이제 아홉 살 아이를 씻기는 엄마가 되어있다. 그렇게 우리는 한 때 가족이었지만 생사확인도 안 되는 사이가 되었다.
시댁은 내 인생에 두 번째 발작버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라니 지긋지긋하기도 하지만 안심이 되기도 했다. 해결해 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두 번째라고 하더라도 발작 버튼이 눌릴 때의 역동은 비슷하지만 침묵하고 시간이 해결하게 내버려 둘 건지 내 목소리를 낼 건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걸 이제는 안다. 나는 떨리지만 후자를 선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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