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안녕하세요!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스토아 철학이 강조한 배움, 인생, 운명, 죽음, 인간의 본성, 우주, 자연, 도덕 등을 주제로 한 ‘자성록’인데요.
독서하며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발췌한 후, 이에 대해 독서 모임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우리가 잃을 수 있는 유일한 것, 현재
3천 년, 아니 3만 년을 산다고 하더라도 잃을 수 있는 것은 오래 당신이 영위하고 있는 이 순간의 삶뿐이며, 소유할 수 있는 것 또한 당신이 잃고 있는 이 순간의 삶뿐임을 명심하라. 이 말은 긴 삶이든 짧은 삶이든 결국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라는 이 순간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소유하고 있지만 일단 지나가 버린 과거는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잃는 것은 재빨리 지나고 있는 이 순간뿐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누가 잃을 수 있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누가 잃을 수 있겠는가?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어떻게 잃을 수 있겠는가?
# Stay present!
영어로 접할 때 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위 문구는 제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입니다. 때로는 이것이 회피나 합리화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유념하곤 하지만, 사실 우리가 과거에 내린 선택은 그 당시로서는 최선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인간의 뇌는 가소성이 있어 경험이 누적될수록 사고 회로가 변화합니다. 지금의 시각에서는 과거의 선택이 아쉬울 수 있어도, 그때의 나는 그것이 최우선이라 판단했기에 채택한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시의 논리와 절차는 희미해지고 결과만 선명하게 남기에 후회가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니며, 과거에 사로잡혀 흘려보내는 현재 또한 머지않아 우리의 것이 아닌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미래는 과거에 비해 유연할 수 있겠으나, 당장 영위하고 있는 현재만큼 통제력이 확실한 영역은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온전히 집중하고 다룰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뿐입니다. 아우렐리우스 또한 이러한 이치를 바탕으로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역설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불필요를 제거한 만큼 삶은 정교해진다
"스스로 만족하기를 원한다면 행위를 적게 하라"라고 어떤 현인이 말했다. 그러나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행위만을, 사회적 존재로서의 이성이 요구하는 행위만을 하라"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적은 행위와 훌륭한 행위로부터 오는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대부분은 불필요한 것들이고 불필요한 말과 행위를 하지 않으면 시간과 노고를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에게 분명 이것이 필요한 행위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불필요한 행위뿐 아니라 불필요한 생각까지도 제거해야 한다. 그러면 그릇된 행위도 사라질 것이다.
# 나를 설명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최근 SNS에서 시간 낭비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타인에게 나 자신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데 소비하는 시간'이라는 글을 접했습니다. 즉, 내가 선택한 행동에 대해 일정 선을 넘어 과도하게 해명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 설명한다 해도, 오해할 사람은 결국 자신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만약 스스로 정립한 기준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했다면, '나를 더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불안에서 오는 자기 의심을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대신 그 귀한 에너지를 나 자신을 더 깊이 고양하고 본질에 몰두하는 시간으로 채우는 편이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설명하는 데 애쓰지 않아도 결국 닮은 가치를 지닌 이들은 서로를 알아보게 마련입니다. 진실된 마음을 나눌 몇 인연들이 곁에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생은 이미 충분한 성공 아닐까요?
베푼 것을 기억하지 않는 고결함
어떤 사람은 자기가 베푼 호의에 대해 즉시 그 보답을 바라며, 또 어떤 사람은 보답을 바라지는 않아도 호의를 받은 사람을 빚을 진 사람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남에게 베푼 선행을 의식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마치 많은 포도송이를 길러준 포도 덩굴이 그것을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또 경기에 나가 달리는 말처럼, 사냥감을 쫓아 달리는 사냥개처럼, 꿀통에 꿀을 가득 채운 꿀벌처럼, 자기가 행한 일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마치 포도 덩굴이 다음 여름의 포도송이 생산에 착수하듯이 곧장 다음 일로 옮겨간다.
#내 사랑의 모양? 상대 사랑의 모양?.
지난 독서 모임에서 이 대목에 관한 질문을 조심스레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이 질문을 콕 집어던졌다는 것 자체가 평소 제가 품어온 고민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만 같아, 못내 쑥스럽고 민망한 마음이 들기도 했던 것 같네요•••
여러분이 기대했던 사랑이 상대방으로부터 돌아오지 않거나, 혹은 내가 기대했던 모양과는 사뭇 이질적인 모양으로 돌아올 때 여러분의 기분은 어떠신가요? 해당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오는 답변이 저와 매우 상이해서 되게 신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타인에게 호의를 기대하는 정도:
친밀한 사람 > 거리감 있는 사람
(독서 모임) 사람들이 타인에게 호의를 기대하는 정도:
친밀한 사람 < 거리감 있는 사람
저는 소중한 사람일수록 제가 베푼 만큼의 진심이 돌아오지 않으면 서운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나 모임의 분들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진정으로 친밀한 사이라면 아무런 계산 없이 무한한 호의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정서적 거리가 있는 이들에게 오히려 계산 없는 친절을 베풀 수 있다고 하자, 다른 분들은 그런 관계에서 오는 불균형에 오히려 불편함을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낯선 이들에게도 기꺼이 마음을 쓰는 저의 면모가 부럽다고도 하셨지만, 정작 저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보답을 기대했던 스스로의 모습에 마음이 꽂혀 못내 부끄러움이 앞섰습니다. ‘보답이 오지 않을 때 서운함을 느끼는 내가 아직 미성숙한 사람인 걸까?' 제가 건넨 선의만큼의 대가를 바랐던 건,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의 크기가 같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 보면 내가 정의한 사랑의 모양이 유일한 정답은 아닐 겁니다. 상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줄곧 제게 보내왔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아끼던 친구에게 생일 축하 연락을 받지 못해 서운함을 내비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되레 본인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만 약속이 잡히는 상황에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하. 제게는 축하 인사가 사랑의 표현이었지만, 그 친구에게는 '먼저 만나자고 연락하는 것'이 자신만의 정성 어린 사랑의 모양이었던 셈입니다.
준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고 서운해하기에 앞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다채로운 형태의 사랑을 이미 듬뿍 받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준 것의 대가를 의식하지 않을 때, 비로소 상대가 보내오는 사랑의 크기가 더 선명하고 따스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Amor Fati!
우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자연은 누구에게도 그것을 할당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은 자기가 지배하는 것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면 절대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이미 당신에게 일어났고 당신을 위해 처방된 것이며 당신과 관련지어져 있고 모든 원인 중 가장 숭고한 원인에 의해 위로부터 내려온, 당신을 위한 운명의 실이기 때문이다.
# 너무 유명한 말이지만. 피할 수 없음 즐겨라
독서 모임에서 '지나친 낙관주의'라는 비판 섞인 농담을 듣기도 했던 대목이지만, 저는 실제로 이와 비슷한 사고방식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아우렐리우스의 생각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제가 앞서 말씀드린 'Stay Present'의 연장선에 있는 마음가짐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바꿀 수 없는 과거라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고 운명으로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삶을 뒤흔들 만큼 거친 파도를 마주해 보지 못했다는 조심스러움은 남습니다. 훗날 더 깊은 시련을 지나온 뒤에도 제가 여전히 이 문장들 곁에 머물며 공감할 수 있을지, 그때의 제가 문득 궁금해지는 것 같습니다.
품격의 차이
최선의 복수는 당신의 적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 말을 아끼고, 단절하라
적이라고 하기엔 거창할지 모르지만, 흔히 말하는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마음들을 마주할 때가 있었습니다. 사교적인 성격 덕분에 많은 인연을 맺어온 만큼, 그 속에서 겪어야 했던 마음의 모양도 참 다양했던 것 같습니다.
가정환경을 은근히 깎아내리거나 저의 연애를 시기하던 친구, 혹은 제 행동이 본인 뜻과 다르다는 이유로 뒤에서 험담을 하거나 이간질로 저를 가두려 했던 친구까지. 돌이켜보면 참 여러 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생채기를 입기도 했습니다.
이런 시간들을 지나오며 제가 배운 것은, 굳이 날을 세워 대항하기보다 조용히 마음의 거리를 두는 법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생각보다 짧고, 그 귀한 시간은 따스함을 선사하는 좋은 사람들로만 채우기에도 모자랍니다. 관계의 소란함에서 벗어나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곁에 있는 진실한 이들에게 마음을 한 뼘 더 내어주는 것. 저는 그것이 가장 평온하고도 확실한 정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면의 힘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혼란에 빠질 때는 빨리 당신 자신으로 되돌아오라.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때에는 동요하지 말라.
# 환경이 나의 습관을 이루는 지분은 어떻게 될까?
최근 읽은 에세이 중 장소가 사람의 습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내용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 뇌는 특정 공간과 그곳에서 하는 행동을 하나로 묶어 기억하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특정 장소에 가면 자연스럽게 이전에 방문했을 때 내가 했던 행동을 떠올리고, 그와 유사하게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집보다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집중이 더 잘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대개 집은 휴식을 취하는 편안한 공간으로 뇌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장소가 주는 분위기에 따라 우리의 행동이 이따금 혼란을 겪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런 혼란에서 벗어나 마음을 다잡고 싶다면, 과감히 장소를 옮겨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새로운 공간의 힘을 빌려, 흐트러진 루틴을 다시 기분 좋게 되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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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