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같은 유혹, 불혹이다.
행복한 서른을 보낸 지 십 년이란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어제로 마흔이 되었다. 십 년의 세월 동안 태평양 횡단 아홉 번에, 미 대륙 횡단 열두 번을 했다.
2004년 석사만 겨우 어렵사리 마치고, 박사 진학이 좌절되어 울먹이며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일대일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파고다 다이렉트 잉글리시 여의도 분원에 영어강사로 일할 때였다. 나이도 서른이 넘은 노처녀인 데다가, 미국에서 산 경험이 있는 전형적으로 비자가 안 나오는 경우니, 3개월마다 재계약하는 이곳에서 일하다가, 비자가 나오면 무조건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양으로 나름 머리를 굴려 구한 직장이었다.
하루는 수업 중에 한미은행 부장으로 계시는 학생 한분이 사적인 질문을 해도 되냐고 하신다. 정말 미국 코넬 대학원에서 식품학 석사학위를 받았는지 물어보셨다. 그렇게 안 생겼냐고 웃으며 답했더니, 더 무례할지도 모르는 질문을 해도 되냐고 하신다. 식품학 석사를 한 사람이 왜 여기서 영어를 가르치느냐고 진지하게 되물으셨다. 갈 곳을 몰라 방황하던 내게 정곡을 찌르는 매서운 칼날 같은 질문에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의 평정을 갖고 웃으며 내가 왜 그 공부를 하고 여기서 영어회화를 가르치고 있는지,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서 다음 시간에 영어로 토론할 수 있도록 준비해 오시라고 숙제를 내드렸다. 사실 그 숙제는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친딸처럼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셨던 모교 이 미순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먼저, 선생님께서 추천서를 잘 써주셔서 선생님 모교에서 식품화학 석사과정을 밟을 수 있었는데, 너무나도 동떨어진 곳에서 다른 일을 하게 되어 선생님 뵐 면목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풀이 죽은 내 어깨를 도닥거려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려고 하는데 아직 영어가 부족하니까 가르치면서 실력을 더 연마하라고 기회를 주신 것이니 낙심하지 말고 더 정진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선생님 분야인 식품 화학보다는 새롭게 눈을 뜨고 공부하기를 원하는 북한 식품 영양 정책이 나에게 훨씬 잘 어울린다며, 이 분야에서 일하고 계시는 많은 분들을 소개해 주셨다. 돌아보니 삼십 대가 가장 좋으셨다며, 젊고 패기가 있으니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는 적기라는 조언도 빼놓지 않으시면서.
석사를 마치던 날, 코넬 대학교의 지도교수님이신 Dr. Lewis와 나는 단둘이 다운타운에 있는 식당에 갔더랬다. 먼저, 어려운 공부 마치게 된 것을 축하한다고 운을 띄우셨다. 그리고, 나를 그저 예뻐하기만 하고 더 다그쳐서 성과를 많이 내지 못했던 것, 미안하다고 하신다. 지금은 심신이 너무 지쳐 보이니 2~3년 정도 일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와서 공부를 하라고 권면해 주셨다.
그런 선생님의 조언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일을 하고 있는데, 여든이 넘으셔도 겨울이면 로키 산맥으로 혼자 스키여행을 다니실 정도로 정정하셨던 내 지도교수님 Dr. Lewis가 노환으로 쓰러지셨다가 일어나지 못하시고 요양원에 계시다는 비보를 듣고 직장을 정리하고 미국에 들어왔다. 말 못 하는 외국인 학생인 나를 거두어주신 은인이시기에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 번 더 뵙고 싶었고,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박사과정 지원도 교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추천서를 받고 싶은 인간적인 마음도 컸기에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났다.
예수님께서는 서른셋에 공생애를 모두 마치셨는데 나는 서른셋에 돌고 돌아 다시 원점에 서 있구나 하면서, 허탈해하며 교정을 거닐고 있는데 예전에 새벽예배를 함께 다녔던 은정이다.
반가움과 놀라움에 소리를 지르며 기뻐하다가 대뜸 하는 말이,
"결혼했냐"라고 묻는다.
" 결혼했으면 내가 여기 혼자 왔겠냐"라고 쌀쌀맞게 답했다.
포기하지 않고 "남자 친구는 있느냐"라고 묻는다.
냉소적으로 웃으며 "있게 생겼냐?"라고 답했다.
내 배우자 첫 번째 기도 제목인 새벽에 기도하는 청년이 L.A. 에 있다고 그 자리에서 지금의 남편을 소개해 주었다.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니, 동글동글하니 나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한다.
입학 허가서도 없이 관광비자로 다시 미국에 나왔을 때, 포기한 것이 배우자였다. 가기 싫다는 나를 한국으로 돌려보내셨을 때, 짝 없이 홀로 외로워하니까 한국 남자가 많은 한국으로 억지로 끌고 가시는구나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내 근처에는 파리하나 얼씬하지 않는 것을 목도하고 배우자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이 작은 키에 꽉 찬 몸무게로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길은, 잘하지는 않으나 평생 잘하고 싶어 하는 공부뿐이라는 생각을 굳힌 지 오래였다.
그래도, 은정이가 중간에서 애를 쓰며 소개해 주었는데 성의를 봐서라도 연락은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은정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