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12일
내가 고등학교 때 전교 꼴찌를 했던 적이 있다. 아주 꼴찌는 아니었지만 꼴찌나 다름없는 등수였다. 선발 고등학교에서 특별전형으로 들어온 탁구 선수 2명이 우리 반에 있었는데, 내가 그들 사이에 떡하니 낀 거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반 48명 중에 난 47등을 했고 탁구선수 중 한 명은 48등 다른 한 명은 나를 제치고 46등을 했다. 나를 이긴 탁구선수는 저 두 아이 중에 누굴까 하며 의아해하기도 했다.
안양여고 2학년 이과 전체 98명 중에서 97등을 했다. 그렇게 내 성적이 곤두박질친 건 그냥 이유 없는 반항심 때문이었다. 연극을 마치고 나서 허탈감이 물밀 듯이 엄습해 왔었다. 축제 때 오를 연극 두 편을 거의 한 달 반 동안 자율학습도 못하고 준비했는데, 연극이 끝나고 남은 건 각 과목마다 따라잡아야 할 산더미 같은 공부뿐이었다.
쪽지 시험을 본다는 말에도 내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걱정만 앞섰다. 결국 중간고사에서 객관식은 2번으로 기둥을 찍고, 주관식은 백지로 냈다. 중간고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각 과목 선생님들께서 따로 호출하셨다. 너 나한테 불만 있으면 말로 하라고 이따위로 성의 없이 시험을 쳤느냐며 호통을 치신 선생님도 계셨고, 고 3을 코앞에 눈 녀석이 정신상태가 글렀다고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로 와서 무릎 꿇으라고 하신 선생님, 이 못된 자식, 시험문제를 낸 선생님을 놀리는 것이냐며 화를 내신 선생님도 계셨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생활 부실장이란 녀석이 이 선생님 저 선생님한테 창피하게 불려 다닌다고 따로 부르셔서 혼내셨다. 나중에 엄마와 언니를 통해서 안 사실인데, 담임선생님께는 내가 제정신으로 시험을 이렇게 볼 수 없다고 요새 하는 짓도 이상하니 잘 설득시켜서 정신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라고 하셨다고 한다.
꼴찌 성적표를 받은 날, 이 일을 저지른 당사자인 내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던지 아직도 그날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사춘기 여자아이들에게 참으로 잔인한 곳이었다. 매달 아님, 매번 시험 결과가 나오자마자 1학년 때부터 작성하는 성적기록표를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거기에는 고등학교 들어오자마자 각자가 적어놨던 꿈도 버젓이 적혀있다. 그 달에 치른 본인의 시험성적으로 막대그래프를 그리게 한다. 그래서 지난달보다 성적이 오른 아이들은 기울기가 양인 막대를 긋고, 나처럼 성적이 떨어진 아이들은 기울기가 음인, 수학 좌표축으로 따지자면 2 사분면과 4 사분면이 지나는 선을 그어야 했다.
자를 대고 그리려고 하는데 지난달보다 성적이 많이 떨어져서 거의 90도에 가까운 급격한 기울기를 눈물이 앞을 가려 도저히 그을 수가 없었다. 자존심도 상하고. 실장이 자기 성적 기입을 다했으면 뒤에서부터 걷으라고 하는데 내가 손만 부들부들 떨고 긋지 못하고 있으니까, 미국 팝에 심취해 있던 짝이 자기가 듣던 워크맨 이어폰을 얼른 빼고 대신 성적그래프를 그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흘깃 훑어봤던 사정없이 곤두박질쳐진 내 성적에 본인도 놀란 듯 내 눈치를 살피다가 미국에서 직수입한 팝송 테이프 어렵게 구한 거라고 하면서 내가 그렇게 듣고 싶다고 졸랐을 땐 콧방귀도 뀌지 않더니만 닭똥 같은 눈물이 걸 그렁하게 걸려있는 보자마자 슬며시 이어폰 한쪽을 내 귀에 넣어주며 들어보라고 했다.
“나, 집에 갈래”
“야, 자율학습 땡땡이쳤다고 너 또 교무실 불려 가면 어쩌려고?”
대꾸도 안 하고, 가방을 집어 들고 집까지 무작정 걸었다. 학교는 도시 안양에 있었지만, 우리 집은 외곽 개발제한구역 시흥시에 있어서 버스만으로도 한 30분 걸린다. 아주 추운 겨울밤이었는데, 가로 등도 없는 어두컴컴한 차도를 따라 걸으면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중간에 한 용달차 비슷한 것이 섰다.
“애, 꼬마야, 이 추운 겨울에 왜 혼자 걸어가니? 아저씨가 태워 줄게, 너 집이 어디니?”
“나, 꼬마 아니에요~!”
한 3시간을 울면서 집으로 걸어왔다. 엄마한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추운 겨울에 하도 많이 울어서인지 얼굴은 흘린 눈물자국을 따라 빨갛게 줄이 그어져 퉁퉁 부었고 손도 추위에 새까맣게 탄체로 꽁꽁 얼었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울면서 피아노를 쳤다. 손가락이 부러져라 마구 건반을 내려치며 흐느꼈다. 그런데, 밖에서 누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흐느끼며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엄마다. 옛날 우리 집은 미음자형 한옥인데 앞마당이 하늘과 맞닿은 그런 구조다.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면 바로 앞마당에 펼쳐진 하늘이 보이고 내 방에 있는 작은 창문으로 고개를 빼 꼼이 내밀고 보면 바깥마당 너머로 산과 논밭이 즐비 지어 누운 것이 한눈에 보이는 그런 곳이었다.
그날 밤 내가 방 안에서 울며 피아노를 칠 때 요새 들어 심상치 않은 막내딸을 지켜보시던 엄마가 몰래 바깥마당에 나가셔서 나와 함께 소리 없이 따라 우셨던 거다. 나는 그날 그렇게 울다 지쳐 잠들었다. 언니와 엄마의 따뜻한 사랑으로, 그리고 가족들의 위로와 격려로 나는 유독 혹독한 열병처럼 나를 옭아 맺던 이유 없는 반항을 접고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서 내가 꼴찌를 한 것이 마치 사회 탓인 냥, 잘못된 교육제도 탓인 냥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분개했었는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그냥 다들 거치는 사춘기를 나는 유독 심하게 앓았던 것뿐이었다.
너무나도 감사하고 지금도 어린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고등학교 때 그렇게 내가 바닥을 일등으로 달리면서 난리를 칠 때조차도 난 엄마나 아빠한테 한 번도
“너 도대체 왜 이러니? 뭐가 되려고 이러니? 정신이 있는 애니, 없는 애니?”
라는 꾸지람을 들어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고3 때 지원한 대학교도 떨어지고 후기대도 차점자 2순위 턱걸이로 겨우 들어갔다가 자퇴하고 나와, 나이로는 삼수지만 횟수로는 재수인 입시준비를 해서 지원한 전기 대학 3개 다 떨어지고, 후기대 겨우 붙었을 때조차도 난 한 번도
“너 어쩌려고 그러냐? 애가 왜 이 모양이냐”
라는 식의 꾸지람을 들어본 적이 없다. 대학 들어가고 한참 후에야, 철부지 막내인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반농담조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엄만 왜 내가 꼴찌 했는데 아무 말도 안 했어?, 왜 다른 엄마들처럼 왜 꼴찌 했냐고 야단치면서 회초리 들고 날 때리지 않았지? 미운 자식은 떡을 주고 예쁜 자식한테는 매 한 번 더 든다고 그러던데, 엄만 날 사랑하지 않았나 봐?, 그리고, 꼴찌 성적표 받아서 내가 울면서 집까지 걸어온 날, 내가 울면서 방에서 피아노 친 날, 엄마도 바깥에서 나랑 같이 울었지? 근데, 왜 그날도 아무 말 안 했어?”
그러자,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응, 그냥 우리 딸을 믿었지. 애가 고등학교나 제대로 졸업할 수 있으려나, 전문대라도 어떻게 들어갈 수 있으려나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엄만 그냥 우리 딸을 믿었지.”
그 얘기를 듣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저렇게 나를 믿어주시는 엄마가 계시니 내가 못할게 무엇이 있으랴 라는 자신감마저 들었다.
이곳 미국에서 석사졸업이 자꾸 늦어지고, 저번 학기 뉴욕 911 사태로 조교장학금이 끊겨 부모님께 어려운 돈 부탁드리고 내가 졸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의구심에 싸여 힘들어할 때 아빠와 전화 통화를 했었다.
이래저래 해서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 하겠지만 결과는 두고 봐야 안다고. 사실 일이 어떻게 풀릴지 나도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막내딸은 잘 해낼 거야. 누구 딸인데~”
아빠랑 전화통화를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돌아가는 모든 것이 불투명해서 앞이 잘 보이질 않아도 앞으로 내 자녀들에게 펼쳐질 인생이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것을 아무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 믿어주는 것, 내 인생이 내 부모의 그 철석같은 믿음대로 그렇게 인도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14시간의 시차 때문에, 그리고 비행기로 20시간이 넘는 먼 거리 때문에 바로 내 곁에서 축 처진 어깨를 다독거려 주시면서 ‘난 너를 믿는다’고 말씀하실 부모님을 대신해서 나를 다독거리시는 분이 계시다.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다.
지난달 코넬 한인 학생회에서 ‘하루’라는 한국영화를 상영했었다. 결혼한 후 6년 동안 아이가 안 생겨서 힘겨워하던 젊은 부부가 어렵게 인공수정을 해서 아이를 가졌는데 그 아이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엄마 뱃속에서 무뇌증이라는 병을 걸려 낳은 지 하루 만에 죽었다.
임신사실을 확인하고, 아직 아이가 걸린 병에 대해서는 몰랐던 아이엄마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교를 하면서 시를 읽어주는데, 뽀송뽀송 내리는 눈 소리가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는 부분이다. 하루만 살고 간 딸아이, 무뇌증 환자였던 신생아 윤진이가 태어난 날은 시처럼 눈이 내리는 날이었고, 하루 만에 죽은 아이를 보며 울부짖는 아내에게 남편은 그때 당신이 읊조리던 시 생각나느냐며, 눈이 오는 소리가 마치 윤진이가 슬퍼하는 엄마 아빠를 향해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느냐며 아내를 위로하는 장면이다.
코넬이 위치한 북부 뉴욕 주의 작은 도시 이타카의 겨울은 매섭다. 새벽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해서 낯에 해 한번 뜨지 않고 어떨 때는 일주일 내내 줄기차게 눈발이 휘날릴 때도 있다. 등엔 남산만 한 가방을, 축 처진 어깨엔 쇳덩이를 짊어진 것 마냥, 작은 키로 땅에 닿을 듯 질질 끌리게 하는 노트북, 손에는 도시락 가방을, 머리엔 눈발을 피해보고자 우산대신 쓴 야구모자에, 그 위에 털모자를 덮어쓴다. 야구모자 창 사이로 불어 닥치는 눈발과 바람을 막고자 벙어리장갑을 낀 작은 손으로 꽁꽁 얼어져 가는 얼굴과 귀를 가리고, 자정에 실험을 마치고 텅 빈 캠퍼스를 가로질러 집까지 걸어오는 날엔 눈물이 난다. 너무 추워서 눈물이 나기도 하고, 체감온도가 알래스카와 맞먹을 정도로 추운 그런 날이면 가족이 그립고, 새벽부터 자정까지의 내 삶이 너무 고단한 것 같아 눈물이 난다.
12년 만에 다시 찾아온 강추위에 너무 추워서 콧물도 나고, 찬 눈보라에 맞닿는 양쪽 두 볼이 꽁꽁 얼어서 손이라도 댈라치면 칼에 베어 찢어질 듯 아픈 날, 눈 속을 헤치며 뽀드득 내딛는 발걸음마다 하나님께서 내리는 눈과 함께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하시며 나를 위로하신다. 부족한 나를 이곳으로 불러주셔서 공부를 시키신 그분께서 공부를 마쳐주시겠다고 한다. 말씀을 성취하는 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다.
“우리 재진이는 나, 여호와의 작정한 뜻 가운데 잘할 것이다, 누구 딸인데~”
하시며, 우리 엄마 아빠가 부족한 막내딸을 믿어주시는 그 믿음의 눈으로 아니 태초이전부터 시작된 그 이상의 신실하신 믿음으로 부족한 당신의 딸 재진이를 믿어주신다.
나는 그런 신실하신 내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
추신: 자정 넘어 실험을 마치고 기숙사 가는 길에 있는 Beebe lake 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