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서재진이야!

2004-01-30 오전 5:19:40

by 서재진

난 이름이 두 개다. 한국이름 하나, 영어이름 하나. 한국이름은 서재진이고 미국이름은 Grace이다. 하나님의 은혜(God's Grace)로 이곳에 오게 되어서 내가 이타카로 오는, 내 생애 생전 처음 타보는 비행기 안에서,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내가 지은 영어이름 Grace.


하루는 한국에 계신 엄마랑 전화 통화하면서,


"엄마, 엄마는 구레이스(Grace)가 누군지 알아?"


"그거, 봉고차 이름 아녀?"


하셨다.


한국에서 영어회화학원 다닐 때, 미국인 영어 회화 선생님께서 우리 반 학생들에게 영어이름을 지을 것을 권장하셨다. 그래서, 처음엔 Jane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달엔, 고민하다가 Anne으로 했고, 그다음 달엔 조금 우아해 보이는 이름으로 Elizabeth라고 했다. 한 번은 선생님이 나를 Elizabeth라고 안 부르고, Liz라고 부르시는 거다. 그래서, 내가,


"No, my name is Elizabeth~! Please call me, Elizabeth~!"


했다. 그러니까, 내게 하시는 말씀이,


"Right, You are Liz..."


나중에 알고 보니, Elizabeth 이름이 발음하기에 너무 기니까 짧게 Liz라고 부른다고 하더군.


어쨌든지 간에, 미국인 선생님께서는 내가 달마다 영어 이름을 바꾸니까 무척 헷갈려하셨다.


"이번 달엔 니 이름이 모라고? 했지?"


하고 맨날 물어보시곤 했다.


서두가 긴데, 지난여름 수영을 하고 나오다가 수영 tag를 주는 아이의 실수로 내 Blue card가 분실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는 학부 여학생이 내 Blue card (blue card는 푸른색의 회원 카드로, 한 달에 15불, 한국돈으로 2만 원 남짓한데, 한 학기 동안 수건과 기타 필요한 운동기구를 대여해 주는 특권 [privilege] card를 말한다)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만 것이다. Blue card를 실수로 남에게 준거까지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는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나 열받으라고 하는 것인지는 내 잘 몰라도 황당해하는 내 앞에서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내 속을 긁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 I'm sorry라는 말 한마디조차 안 한 그 학생이 너무 꾀씸해서 담당자에게 report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나는 일하고 있는 학부생 아이의 신상명세서와 실수에 대한 진정서를 그 자리에서 받아내서 그다음 날 신고하고, 번거롭지만, 다시 blue card를 다시 재발급받았다.


그로부터 한 두어 달이 지났을까? 이번엔 Issue room에서 일하던 다른 학생의 실수로 또 내 재발급받은 blue card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더군. 그래서, 전처럼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는 진술서를 그 자리에서 받아내고 내 blue card를 가져간 아이의 blue card를 내가 대신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얼른 내 이름으로 바꿔야지 하며 게으름을 피우길 두어 달.


하루는 수영을 하고 나오는데, swim tag를 돌려주면서 issue room에 있는 여자 아이가 대뜸 내 이름을 묻는 거다.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서 윗사람이 시켜서 그런 것인지 즉흥적으로 그냥 심심해서 확인차 이름을 물어본 것인지 내 잘은 모르지만, 순간 당황해하며 난,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내가 들고 다니던 다른 사람 명의의 그 blue card에 적힌 이름이 뭐였더라... 진땀을 빼면서 일본인 뉘앙스를 풍기는 카드주인의 이름을 어렵게 발음하면서 지금까지의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여기서 일하고 있던 누가 누가 내 것을 잃어버려서, 다른 사람 것을 들고 다녔는데, 이번이 두 번째라 솔직히 귀찮아서 내 명의의 blue card 재발급을 안 하고 있었노라고... 나는 있는 사실을 말하면서도 이렇게 진땀을 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로부터 몇 주 후, 내 것을 다시 재발급받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카드 재발급받은 그날, 내 그전 blue card를 찾았다고 issue room을 지키던 아저씨가 내게 말하더군. 그래서 그다음 날 나는 새로 만든 blue card 보다는 그전 것이 더 애착이 가니까, 그전 것으로 지금의 카드를 바꾸고 싶고, 지금 새로 만든 card는 버려달라고 부탁드렸다. 손때 묻은 내 이름 석자 Jaejin Suh 가 당당히 찍힌 내 옛날 blue card를 집어 들고 한숨을 내 쉬었다.


내게 붙여진 내 이름대로 살기가, 내 이름을 찾으며 살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나는 서재진이다. 載眞 천천히 , 실을 , 참 眞... 서 재진. 대부분 사람들은 이름의 뜻을 말할 때 성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자만 해석에 부치지만 난, 내 이름을 지어주신 우리 아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내 맘대로 성까지 한몫 더 가세해 해석하곤 한다.


내 이름의 뜻은 "천천히 삶의 참된 것을 실어 나른다. 천천히 삶의 참된 것을 깨달으며 산다"이다. 여기서의 참된 것은 주님의 진실, 진리를 말하고, 천천히라는 말은 내 삶 전반을 걸쳐 지속적으로라는 의미다. 그리고, 하나 더 붙이고 싶은 말은 주님과 함께.


다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천천히 주님과 함께 참된 것을 깨닫는다.


영어로는,


"I realise the truth of my life very slowly with God"


그리고, 그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추신: 2004년 1월 30일 새벽 5시 19분 40초에 올린 글을 찾았습니다.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집니다. 공부했다는 말 한마디 없는 일기를 보며 헛웃음도 납니다. 미워할 수 없는, 그리고 현재의 저를 만들어낸 과거의 제 모습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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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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