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프지 말자
나에게는 14살 차이가 나는 큰언니가 있다. 6남매의 막내인 나와, 첫째인 언니. 언니는 내 기저귀를 도맡아 빨아줬던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언니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교복을 입은 어른 같은 모습이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언니는 결혼을 했다. 언니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형부라는 작자는 외항선을 타며 몇 달에 한 번씩 집에 왔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람도 피웠다고. 게다가 시어머니는 언니에게 표독스럽게 시집살이를 시켰다. 언니는 결국 시어머니의 폭행과 남편의 이중생활에 아들을 두고 집을 나왔다.
내 사춘기 시절, 언니의 삶이 마냥 미웠다. 안쓰러우면서도 위태로워 보여서 싫었다. 큰언니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지만, 언니는 마냥 죄인 같았다. 언니는 최대한 남의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걸 극도로 꺼려하며, 가족들과 밥도 같이 먹기 싫어했다. 그러다 집에 두고 온 아들이 마음에 걸려 결국 그 집에 다시 들어가기도 했다.
그때처럼 언니가 미웠던 적이 있었을까. 그땐 자식을 낳아보지 않아서 언니의 마음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니는 아들을 데리고 나올 심산이었지만, 그 집에서 허락해 줬을 리가 없다. 결국 언니는 이혼을 했다. 이후 아들이 하나 있는 지금의 형부를 만나 재혼했다. 두고 온 아들이 눈에 아른거려서일까. 언니는 유독 조카를 예뻐했다. 이후 언니와 형부에게 딸이 하나 더 생겼고, 언니에게도 어느덧 점점 웃는 날들이 많아졌다.
언니가 바라보는 나는 언제나 어린아이인 거 같다. 한 번은 엄마 집에서 수박을 썰기 위해 도마와 칼을 꺼내는 나를 언니가 말렸다.
“손 벤다. 비켜 언니가 해줄게.”
“와 엄마 나한테는 맨날 다 커서 그것도 못하냐고 하면서 40살 넘은 이모는 수박도 못 썰게 하네”
우리를 보던 조카가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그렇게 언니에게는 여전히 내가 어린아이인가 보다.
전화벨이 울린다. 좀처럼 먼저 전화하는 일이 잘 없는 큰언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한다. 아직 내 병명을 알고 있는 건 셋째 언니와 남편뿐이다. 한참을 고민해도 전화벨이 끊기질 않자 결국 전화를 받았다.
“응 언니”
“막내야. 나 아프대. 나 암이란다.”
언니가 운다.
“뭐라고? 무슨 암?”
“3기도 더 됐대. 폐로도 전이가 됐다고 큰 병원 가란단다. 아이고.”
나도 따라서 운다. 둘이 소리를 내서 한참을 울다가 나도 결국 언니에게 이야기했다.
“언니, 나도 암 이래. 수술하래서 날짜 잡아놨어.”
언니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쳤다.
“뭐라고? 네가 왜. 어디가 왜!”
자기가 아픈 건 괜찮은지. 갑자기 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왜 아픈지 묻기 시작하는 언니의 목소리에 더 눈물이 났다.
“언니, 우리 애들 아직 어린데 어쩔까.”
“언니가 미안하다. 언니가 미안해 너한테 전화를 해서. 너라도 안 아파야 할 텐데. 막내야 우리 잘 이겨내자. 그만 울어. 울지 말고 우리 아프지 말자. 잘 치료하자 같이.”
울지 마라면서 계속 우는 언니의 목소리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