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이 모자라
아이가 100일이 지나자마자 난 회사에 출근을 했다. 그 시절에는 출산휴가만 겨우 쓸 수 있었다. 육아휴직은 꿈도 못 꾸는 직장이기에... 아이와 100일을 함께 하다가 회사를 가야 할 때가 오니 마음이 착잡했다.
출근이 시작되면서 아이도 출근을 하게 되었다. 아직은 바구니카시트에 있을 정도로 작았기에 아침이면 신랑이 카시트를 들고 10분 거리 친정집으로 갔다. 하지만 친정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아파트의 5층이었고 아이가 점점 무거워지며 바구니채로 들고 올라가는 것도 버거워졌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아침이면 아이는 친정집으로 보내져 우리가 데리러 가기 전까지 친정엄마가 키우는 강아지들 사이에서 조심조심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정오빠가 연락이 왔다. 엄마가 우리 집에서 함께 큰 평수로 옮기면서 아이돌보고 같이 지내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보태준다고.... 아들 처가살이 한다고 생각할 불같은 시어머니를 생각하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 그냥 근처에 살면 더 좋을 거 같아. 같은 아파트면 엄마도 편하고 나도 맡기기 편해서 좋을 거 같아."
이 이야기를 신랑한테 하니 걱정이 태산인 얼굴이다. 나는 사실 아이를 봐주기 위해 엄마가 근처 오는 건데 무슨 상관일까 싶어 시어머니를 생각 안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엄마 성격을 아는 신랑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같은 아파트에 매물이 나오면 보기 시작했는데 옆집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옆이면 시어머니가 더 난리 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나온 매물이 같은 층에 6층이었다. 우리는 14층이라 아이를 맡기고 바로 출근도 되는 거리었다. 그렇게 몇 달 후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이사 온 날도 신랑은 얼굴이 좋지 않았다.
" 어쩌다 알게 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하는 게 좋겠어."
" 알게 되면 그다음에는 어떡할 건데? "
" 애 봐주는 거 때문에 사실을 알게 된 그때쯤 이사 오셨다고 해야지."
"...."
아이를 봐주고도 이렇게 지내야 한다니..... 그렇게 시작된 거짓말은 10여 년이 되어 엄마가 이사 나가게 된 지금까지 모르게 되었다.
그렇게 엄마가 바로 아래층에 오시니 우리는 편했다. 아이를 엄마집에 맡기고 저녁에 데리고 와서 목욕을 시켰다.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낮동안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만든 이유식을 먹여주고 놀아주고 기저귀 갈아주는 것까지였고 우리가 저녁에 데리고 와서 씻기고 쟤우기까지 하면 하루가 끝났다. 그러면 보통 10시가 다 되어 우리도 자야만 했다. 아침에 출근은 7시쯤은 나가야 8시 반쯤 도착해서 9시 전에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톱니바퀴 돌듯 흘러갔다. 그 사이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아이가 4개월쯤 되면서 이유식이 시작되었고 그때는 만들어진 이유식은 생각도 못하고 당연히 다 만들어서 먹이는 줄 알고 이유식을 모두 만들었다. 평일에는 도저히 시간이 안되어 주말에 이유식을 일주일치를 만들어 냉동해 놓고 먹였다. 마트에 가면 한우로 이유식용을 구매하고 브로콜리, 당근 등의 야채와 함께 쌀을 갈아서 이유식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요령이 없어 하루 종일 숟가락으로 저으며 시간을 다 보냈지만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 압력밥솥으로 한 번에 만들어 이유식 통에 나눠 담았다. 그렇게 한 가지 메뉴로 일주일치를 만들어 놓고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하나씩 꺼내서 친정엄마가 먹였다. 아이는 그렇게 다양한걸 못 먹여도 웃으며 잘 먹었다. 순한 아이라 그러겠지만 너무 감사했다.
평일부터 주말까지 쉼이란 없었다. 거기에 주말마다 부르는 시댁 때문에 이제는 아이의 분유부터 기저귀까지 한 짐을 싸들고 토요일 아침 8시부터 가야 했다. 멀지도 않은 시댁을 그나마 격주로 쉰다고 하고 2주마다 가서 자고 와야 했다. 그러면 나에겐 집안 청소나 이유식을 만들 시간이 주말에는 없었다. 평일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 8시가 다되었고 그때서야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며 이유식을 만들어야 했다. 배려가 없었다.
이렇게 힘이 들지만 아이가 주는 기쁨은 그 이상이었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포동포동 살이 오르며 예뻐지고 말을 조금씩 하며 귀여운 짓을 했다. 점점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첫째 때는 때 되면 퇴근해서 아이를 볼 수 있었던 거 같다. 소중한 시간이 흐르고 돌잔치까지 하면서 육아에 대한 정보나 노하우가 생기고 어디 가던지 내 이름이 아닌 아이 이름의 엄마로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누구 엄마.. 누구 어머니라고 부르는 소리가 생경했다.
이제 돌이 되었고 그때까지 집에서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가 크다 보니 힘에 부치는 엄마가 보였고 아이도 하루 종일 집에서 할머니랑만 있는 것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2개월 첫 돌이 지나자마자 어린이집을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