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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혜 Oct 25. 2021

경찰 신고 대신 '안전이별' 검색하는 여성들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 이야기

천성이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걸 좋아하기 때문인지 주변인들의 고민을 자주 듣는다. 오래간만에 지인 A를 만났다. 그날 우리의 화두는 '안전이별'이었다. A에게는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헤어질 수 없다며 A에게 애원을 넘어 협박에 가까운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남자 친구는 A의 집과 직장, 인적사항을 모두 알고 있었다. A는 혹시라도 남자 친구가 찾아올까 봐 걱정했다. 나 역시 얘기를 들으니 덜컥 겁이 났다.


A가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날 열심히 '안전 이별' 방법을 고민했다. 나는 A에게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사를 하게 하고 싶었지만 계약기간이 남아 있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A는 직장과 거리가 있어 선뜻 대답이 어려운 눈치였다. 경찰에 신고해 보는 건? 넌지시 묻자 A는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이후 A는 지자체나 경찰이 아닌 가족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했다. 다행스럽게도 남자친구는 더 이상 A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왜 공권력에 신고하지 않았을까


공권력에 도움 구하지 않는 여자들... 왜?    ⓒ unsplash


돌이켜보니 A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전 남자 친구에게 스토킹을 당하던 친구 B는 신고를 해도 달라지는 게 없자 이사를 했다. 여자들은 교제하던 상대에게 직간접적 피해를 입어도 왜 공권력에 기대지 않을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여자들이 공권력에 의지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의지하려야 할 수 없는 허술한 구조가 문제였다. 신고를 해도 신변이 보장되지 않으니 신고를 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거였다. 친구 B가 스토킹을 당하고 이사를 한 것은 2010년대 중반의 일이다. 그리고 스토킹 처벌법은 2021년 3월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21일부터 본격 시행됐다. 1999년 관련법이 발의되고 22년만이다.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는 108이라는 숫자로 시작된다. 책의 저자인 <오마이뉴스> 이주연, 이정환 기자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서로 사귀다 상대를 죽인 사건의 판결문 108건을 찾아냈다.


이들은 1362페이지에 달하는 판결문을 읽고, 정리하고, 분석한 끝에 결론을 내린다. '데이트폭력'이라는 단어로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죽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저자들은 "이름은 인식을 바꾼다"고 말한다.(87쪽) 그렇게 '데이트폭력'을 대체하는 '교제살인'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108이라는 사망자 숫자 앞에서 나는 그만 망연해졌다. '안전이별'을 염원하던 A가 떠올랐고, 아직도 어두운 골목길을 두려워하는 B가 떠올랐다. 그러니 읽어야 했다. 이런 일들이 대체 왜 반복되고 있는지, 막을 방법이 있기는 한 건지 알기 위해서.


여자는 경찰에게 협박 문자를 보여줬고 그동안 남자에게 지속적으로 강간을 당했다고 말했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얼굴을 경찰이 보는 앞에서 주먹으로 가격했다. 가해자의 신병이 경찰서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날 밤 남자는 조사를 받고 경찰서에서 벗어났다. (98,99쪽) 


그렇게 경찰서를 벗어난 남자는 다음날 여자의 직장으로 찾아갔다. 남자는 불산을 여자의 얼굴에 마구 뿌렸다. 여자는 죽었다. 이런 대목에 이르면 정말이지 책을 덮고 싶었다. 살릴 수는 없었던 것일까. 남자가 불산을 뿌리기 전에, 죽이기 전에 피해자와 분리시킬 순 없었을까. 책 읽기를 멈추고 아무리 크게 심호흡을 해도 갑갑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일선 경찰관들도 문제를 정시하고 있었다. “독자적인 데이트폭력처벌법의 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현재 일선 치안 현장 경찰관들의 여론이다.”(108쪽), “실효성 있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서는 피해자와 직접 대면하는 경찰이 범죄로 나아가기 이전에 선제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어야 한다. 이러한 입법적 개선은 피해자 보호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경찰에 더 큰 의무와 부담을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다.”(111쪽) 두 발언 모두 현직 경찰관들이 논문과 발표문을 통해 한 이야기들이다. 


살리기 위해 우린 뭘 할 수 있을까    ⓒ unsplash


책의 저자들은 “공정에 반 발자국이라도 다가가”(180쪽)기 위해 방법을 찾는다. 이들은 눈을 돌려 미국 미네소타주의 도시 덜루스를 주목한다. ‘덜루스 모델’은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강력하게 보호하며 가해자를 의무체포하는 제도다. 저자들은 덜루스 모델이 결국 가해자의 재범률을 큰 폭으로 낮추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경찰 조서에 피해자의 경험과 맥락을 담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191쪽)는 지점이었다. 


덜루스 모델처럼 살인의 ‘전조’를 막고 피해 여성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이 공권력의 책무라면 나 같은 개인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책 속 김홍미리 활동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가해자는 문을 벽으로 만드는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누가 벽을 문으로 만들어야 할까요? (중략) 친밀한 관계에서 폭력에 노출된 사람에게는 ‘내가 뭘 할 수 있어? 어떻게 해야 도움이 돼?’라고 말을 건네는 게 중요합니다. 옆에 있어주는 게 ‘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231쪽)


실은 지금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날 기준으로 포털 검색창에 ‘살해’라는 키워드로 뉴스를 검색하니 “헤어진 여성 살해 뒤 시신 훼손, 유기한 50대 검찰 송치”라는 기사가 상단에 뜬다. 만나주지 않아서 여자들이 죽는다. 아직도. 여전히.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책에서 답을 구한다. 죽이는 이의 격분을 헤아리지 말 것. 죽임 당하고 지워진 여자들을 기억할 것. 살릴 수 있는 여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것. 그 첫 단추로 당신에게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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