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코로나 시대에 워킹맘이 되었다.

by Grace Hanne Lee

아이를 낳은 지 일 년 삼 개월.

코로나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모두 당겨 쓰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돌쟁이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했다. 아이를 낳았을 때는 돌이라는 것이 꽤나 먼 이야기이며, 돌이면 사람 되는 줄 알았다. 서른셋이나 되고서도 아직도 내 앞가림 못 하는 내 스스로를 잊었다보다. 이런 시국에 말도 못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하려니 마음이 답답했지만, 이 역시 크게 보면 신의 뜻이려니 마음 굳세게 먹고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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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반부터 일을 시작해서 쉼 없이 달려온 서른둘. 11월 연애를 시작해서 12월 청혼을 받고 3월 상견례에 6월 결혼 그리고 다음 해 11월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바로 그날, 나무를 만났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만큼 강력한 운명을 만나 행복과 사랑의 베일에 가려져 여기까지 달려왔다. 지금을 살아가는 세대들에겐 전쟁과도 같을 정도로 시대의 큰 변화를 가져온 팬데믹이 겁을 주어도 알콩달콩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하루는 행복이었다. 물론 나 역시 생애 첫 경험인 육아기에 서투르고 어렵고 힘들기도 했고, 그 위에 코로나까지 겹쳐 불편한 것들도 상당했다만 아이와 함께한 휴직기간은 꿈같은 시간이었다. 복직 직전에서야 겨우 깨달았지만,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내가 사회로 나온 이후 처음으로 경험한 완전한 직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라는 직업은 아이의 출산과 동시에 주어지는 완벽하고 온전한 직업이었다. 어릴 적 아무리 큰 실수를 해도 내가 온전히 부모님의 딸이었던 것처럼 완전한 지위와도 같은 안정감이었다. 일을 시작한 이후로 사회에서 나는 나의 능력과 쓸모로 가치 매김 되었고, 살아남기 위한 수많은 노력으로 지금의 내 자리를 만들 수 있었는데, 이 마저도 매일같이 여러 요소들로 불안할 수 있는 상태였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깨달음이지만.)


아무런 증명이 필요 없는 안정된 상태가 소중했고, 아직 말도 못 하는 아이를, 심지어 마스크도 잘 쓸 줄 모르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것이 못내 맘이 편치 않았다. 복직을 몇 개월 앞두고서 나는 회사원이 아닌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부단히도 찾아봤다. 남편과 같이 사업을 해볼까, 그림을 그려 팔아볼까, 작은 회사에 재택을 보장하는 마케팅 일을 찾아볼까, 아기 옷이나 장난감들을 떼다 파는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을까 등등 이곳저곳 들여다보고 시도도 해보았다. 하지만 평생 회사원으로 살아온 내가 육아와 병행하며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내기는 꽤나 어려웠다. 결국 시간은 다가왔고, 우선 6개월을 목표로 복직했다.


복직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걱정했던 것만큼 나무가 정서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동료들의 배려로 야근도 잦지 않았다. 하루하루 아이가 자라는 것으로 모든 노동의 보상을 삼아야 했던 시간이, 어찌 되었든 한 달의 시간을 채우면 월급으로 돌아오는 시스템으로 들어가니 속물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공공연히 인정받는 느낌마저 받는다. 한 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돌아올 월급날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돈도 보내고 맛있는 음식도 시켜먹으며 적당한 기분의 환기도 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은 여전히 있다. 아이의 두뇌가 완성된다는 세 살까지 과연 내가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아이에게 부족함 없는 사랑의 토대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걱정이 그중 가장 큰 불안이다. 하지만 생은 꽤나 단단하기에, 나의 나무는 나와 남편의 노력 그 이상으로 자라는 존재라는 믿음이 있기에, 코로나 이 시국에도 담담히 워킹맘을 시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