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굵지도 못했던 나만의 시간
주말이나 연휴는 주로 남편과 나무가 다 같이 시간을 보낸다. 남편도 이제껏 그래 왔겠지만, 회사-육아의 병행 길에 혼자만의 시간은 사치 이리라. 물론 우리 모두 함께하는 시간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제일 그리운 건 죄책감 없이 멍 때리는 시간. 취미로 그림을 그리거나 밀린 책상 정리, 추억을 뒤지며 외장하드 정리하는 등 나의 놀거리 루틴은 없어졌다.
오늘은 모처럼의 나 홀로 연차의 날이었다. 남편 회사와 달리 삼일절에 붙여 강제 연차 소진일이었다. 아이폰 메모에는 나 혼자만의 시간이 생긴다면 할 일 리스트가 가득하다. 하지만 인생은 늘 해야 하는 것에 대한, 하고 싶은 것의 참담한 패배이듯, 나무를 어린이집에 보낸 황금시간 10-14시에 밀린 봄청소를 위해 청소업체 일정을 예약했다. 아무래도 아이를 보며 대청소하기엔 먼지 등이 걱정되었고, 이번엔 벼르고 벼르던 베란다 곰팡이 결로까지 없애버리리라 다짐한 터라 나름의 기대감도 있었다. 그렇게 청소 매니저님과 부지런히 청소를 하다 보니, 점심 깨에 친정엄마가 점심 반찬을 들고 놀러 오셨다. 마침 시장하던 차에 식사를 하고 나니 어느새 정리 여왕 김여사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그렇게 얼결에 거실과 나무 방, 베란다까지 구조를 바꾸고 옷장 정리까지 하고 나니 어느새 매니저님은 가시고 나 역시 나무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다. 하다 못해 14시에 청소를 끝내고 아이를 데리러 가는 15시까지, 잠시라도 그림이나 그리거나 넷플릭스라도 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래 참았던 대청소를 드디어 할 수 있었다는 보람으로 그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하원길에 올랐다.
걸어서 15분 넘게 걸리는 탓에 차로 하원을 하는데, 마침 남편에게서 연락이 온다. 다가오는 재계약을 앞두고 집주인이 전세 차액분을 월세로 돌리고 싶으니 재계약 의사가 있는지 답을 달란다. 최근 뉴스에 나도는 집값 대란의 한 중간에 있는 곳에서 살고 있기에, 뉴스들이 떠들던 분쟁사건들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바싹 긴장되었다. 맘 속으로 걱정만 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니 괜히 혹시나 하는 불안함이 있었다. 우선은 남편에게 아무 말도 말고, 내가 돌아가는 상황을 한번 볼 테니 그 후에 답하자고 해두고 부리나케 나무를 데리고 와서 친정으로 갔다. 친정에서 한참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마음만 더 어수선해졌다. 정부의 어지러운 부동산 정책은 포털사이트 곳곳에 여실이 녹아져 있어 혼란에 혼란만 가득했다. 아무래도 발로 뛰며 알아봐야 할 듯하여, 우선은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인근 공인중개사들을 돌아 정보를 얻었다. 대충 보아하니, 전세 재계약 시 인상률이 5%로 상한 되어 있어, 몇몇 집주인들은 2년 전 시세에 2배 가까이 오른 시세에 아쉬움을 월세 전환으로라도 푸는 듯했다. 단 몇몇 더 고약한 집주인들은 편법으로 전세금을 아예 낮춰 세입자에게 일부 돌려주고 월세를 더 높게 부르는 경우도 있단다. 세입자 보호법을 들먹이며 주인의 요구에 불응하면, 주인은 마지막 카드로 자신이 들어와 살겠다는 고시를 하여 재계약이 결렬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본인이 거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 과태료 부담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 그 금액이 시세차익보다 낮으면 그런 방법을 억지하는 경우도 있단다. 참으로 심란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나만을 위한 길이 있을 테다 하는 묘한 믿음으로 마음을 다잡고 당시 우리 집을 계약했던 부동산으로 갔다. 이상하게 매우 낙관적인 부동산 중개인은, 보통 주인이 들어와 살겠다는 고시는 법적으로 6개월에서 2개월 전까지는 해야 하는데, 우리는 5월 재계약으로, 시점이 매우 애매하여 주인이 들어와 살겠다고 고시하는 게 잘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단다. 어딘가 정확하진 않은 말에 못내 마음이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우선 별수 없기에 중개인이 제안해준 대로 집주인에게 재계약 의사가 있으며, 워낙에 월세는 생각지 못했어서 마음에 준비는 안되었으나, 우선 얼마를 생각하는지 묻기로 했다. 우선 그렇게 일단락을 시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6시. 정신없이 정보를 찾으며 아이와 놀아주다 보니 저녁시간이다. 나무의 밥을 먹이고 긴 물놀이까지 마쳤다. 그제야 오전에 집 구조 바꿔둔 것을 아이가 꽤나 재밌어하고, 좋아하고 있단 걸 알게 되었다. 집안 구석을 탐구하며 돌아다니는 아이를 보니 오늘 하루, 어디 한번 편히 앉지도 못하고 뛰어다니던 것이 꽤나 뿌듯하니 마음에 보상이 되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하고 싶었던 어떤 것을 했다고 하더라도 오늘 이 아이가 내게 웃음 짓고 재밌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마음이 채워지진 못했을 것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나를 위한 시간보다, 우리를 위한 일들에 열심을 내고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 이렇게 뿌듯하고 보람차다는 것이 참 새로웠다. 그렇게 나무도, 내가 이 아이와 매 순간 함께하지 못해도 늘 이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행복해했으면 좋겠다.
p.s. 그리고 보니, 오늘 나무는 새 학기를 맞아 새로운 선생님에 새로운 환경에서 하루를 보냈을 텐데,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와서 충분히 놀아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겨울생 나무는 아직 15개월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1세 반으로 등반해서 이제 3명이서 선생님 한 분 밑에 있던 것과 달리 5명이서 한 반이다. 그마저도 원래 담임선생님이 아예 원을 그만두시는 바람에 아이에게 어린이집이 또 새로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워킹맘의 하루는 또 이렇게 뿌듯했다가 미안했다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