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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디디아 Aug 17. 2020

그들의 위로(사별후 4)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마주해보라

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지만 나는 무엇보다 사람을 통해 배우고 성장했다. 사람을 통해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격려와 위로를 받았고 삶의 지혜를 배웠다. 남편이 죽은 후 나는  다양한 위로를 받았다. 각 사람의 형편과 성품, 친분의 정도가 다르니 위로도 제각각이었다. 내가 받은 위로에 순위를 정할 수 없음은 모든 위로가 나를 격려하는 마음 담고 있었으며, 슬픔을 극복하는 힘이 되고 감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엄마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셨고 그 소식을 들은 할머니가 충격으로 같은 날 사망하셨다. 사고 당일 나는 동아리 MT를 갔었고 통신망이 빈약한 시절이라 발인 하루 전에야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한 채 장례식이 끝났고 5일 후 나는 학교로 돌아갔다. 몇 명 친구들 빼고는 대다수 지인들이 이 사실을 몰랐다. 나는 상실의 슬픔을 내색하지 않았고 별일 없는 듯 학교생활을 했다. 시간이 지난 후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뒤늦게 학교로 찾아왔고, 어느 날 룸메이트는 “왜 말을 안 했어!” 하며 나를 안아주었다. 의도적으로 숨긴 것은 아닌데 20살의 나는 내 슬픔을 주변에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니 친구들은 내가 어떻게 힘든지 알 수 없었으며 나도 친구들도 적당한 위로의 방법을 알기에는 미숙한 나이였다. 적절한 위로를 받지 못한 채 슬픔의 시간을 혼자 통과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남편을 보내고 나서 나는 지인들의 도움과 위로를 피하지 않고 감사히 받기로 마음먹었다.      


사고소식을 듣고 남편의 교회 친구들은 가장 먼저 병원으로 달려왔고, 멍해진 나를 대신해 모든 장례식 과정을 도와주었고,  남편의 유골이 땅에 묻히는 순간까지 함께 있었다. 많은 분들이 나와 아이들을 안아주었으며 나는 그 품에서 눈물을 감추지 않고 울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이 먼 길을 달려와 같이 슬퍼해 주었고, 아마도 장례식 후엔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 남편의 친구들은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는 아들에게 남편의 대한 추억을 들려주며 아들을 위로해 주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슬픔을 함께 해주고 모든 절차가 잘 진행되도록 도와준 많은 이들이 나와 아이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니 많은 분들이 내게 밥을 먹이고 싶어 했다. 연로하신 이 권사님은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한다며 오곡밥과 나물과 김치를 정성스레 담아 버스를 타고  찾아오셨다. 퇴근 무렵이면 동네의 숙이 언니가 “저녁밥 먹으러 와. 밥상 차려놨다” 며 문자를 보냈다. 언니가 차려 놓은 밥상 앞에서 형부는 내게 말했다. “우리 먹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더 올릴 것인 게 언제든 내 집처럼 와서 밥 먹고 언제든지 자고 가. 내가 방에 뜨거운 군불도 넣어줄라니까.”  어느 날은 맛있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 들고 후배가 찾아왔고, 또 어느 날은 직장에 있어야 할 친구가 찾아와 별 말도 없이 하루 종일 옆에 있다가 조용히 돌아갔다.      

상가의 00의원 원장님은  마음이 약해지면 면역도 약해진다면서 독감 예방접종을 시더니 그 후 100일 넘도록 점심 도시락을 싸다 주셨다. 도시락 통을 돌려 드려야 하니 나는 억지로라도 매일 점심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100번이 넘는 도시락을 싸 본 적이 없는 내가 이런 위로를 받는 것이 송구해서 어느 날은 도시락을 먹으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월요일마다  윤 선배는 저녁밥을 같이 해 먹자며 퇴근 후 장을 봐서 우리 집으로 왔다. 그리고 같이 저녁을 차려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낸 뒤 밤 11시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 난 너처럼 글을 잘 쓰지도 못하고 또 이런 일을 겪어보지 않아서 어떻게 너를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위로라곤 너와 밥을 먹고 너와 사소한 하루를 나누며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뿐이라서 미안해.” 그녀의 말에 뜨거운 감정이 울컥 올라와 목이 메었다. 많은 이들이 나의 허한 속을 채우기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리고 반찬을 만들어 주었다.

' 그들은 알았을까? 내 속을 채우려고 애쓰던 그들의 마음이 상실감으로 허기진 내 영혼을 채우는 양식이 되었다는 것을.... ' 나는 그들이 준 음식을 삼키며 육신의 허기를 채웠고 그들의 마음을 삼키며 상실이 만든 마음의 허기를 달래었다.   

   

어느 주말 40년 지기는 여행용 캐리어를 사들고 찾아와서 말했다.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여기 간단히 짐 싸서 떠나자. 내가 동행해 줄게.” 또 다른 친구도 비슷한 문자를 보냈다. “ 어디든 가고 싶은 곳 있음 말해. 나랑 가자. 우리 여행 가자.” 남편의 1주기 추모식후 나는 친구와 둘이서 여행을 떠났다. 평생의 동행인 남편을 잃었지만 그가 죽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혼자가 아닌 여행을 떠나고 기꺼이 동행해 주는 이들에게 위로를 얻었다.

     

사별 후 많은 이들이 나를 찾아와  자신의 마음 아픈 사연을 들려주었다. 정신과 치료 중인 아들을 둔 엄마 A는 아들의 특별함과 아들을 향한 엄마의 애달픈 노력과 사랑에 대해 고백했다. 긴 애기 끝에 그녀는 내게 말했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이런 애기 너한테 처음 말하는 거야!’  우리는 서로를 꼭 안아주었다. 후배 B는 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던 10대 시절과 사별한 언니가 오랫동안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도 어떤 위로도 해주지 못했던 마음의 무게를 고백했다. 오랫동안 그녀를 알았지만 나는 처음으로 그녀 내면의 아픔을 만났다. 친구 C는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부채를 남긴 채 3남매를 버리고 떠난 엄마, 오갈 곳 없는 어린 3남매를 품어야 했던 할머니와 동생의 가출, 6년 만에 다시 만난 동생의 슬픈 삶.”을 처음으로 고백했다. 나는 그녀가 힘든 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했지만 그토록 암울한 아픔을 견디고 눈물을 삼키며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 내 친구 참 장하네. 진짜 잘 컸다”라고 말해주었다. 항상 유쾌해 보였던  D은 중독자인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 중독 학교에 다녔고 지금은 중독 학교의 스텝으로 봉사한다는 고백을 했다. 말수 적은 E은 남편과 사별 후 3살 딸을 품고 살아온 15년 삶에 대해서 처음으로 들려주었다. 어느 날 가게를 방문하신 76세 어르신은 “슬픈 일을 겪었다고 이제야 들었어요.” 하시며 내 손을 가만히 잡으셨다. 애들이 몇 살이냐고 물으시더니 “ 애들만 위해서 살지 말고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난 43살에 혼자돼서 3남매를 키웠는데.... ” 하시면서 76세 인생의 회한을 들려주셨다. 그동안 한 번도 그런 애기를 한적 없던 어른의 평온한 미소 뒤에 숨겨진 사연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사별 전에 그들은 내게 이런 고백을 하지 않았고 나는 그들이 말하지 않은 아픔을 알지 못했었다. 나는 생각해본다.

그들은 왜 내게 자신의 아픔을 이제야 고백하는가? 나는 그들의 인생에 전부터 있었던 사람이고 사별을 겪었다 해서 내가 갑자기 달라진 것도 아닌데 그들은 왜 내게 자신의 깊은 내면의 고통을 보여주는가?’


각자에게  묻지 않았으니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지만, 그들의 고백은 나를 향한 그들만의 위로였다고 짐작된다. 다르긴 하지만 그들 모두 상실의 시간을 보냈고 고통을 받았다. A는 아들의 건강을 잃었고, C는 부모와 따뜻한 유년시절을 잃었으며, D은 남편의 중독으로 재산과 남편을 향한 신뢰를 잃었다. 젊어 사별한  E는 행복했을 30대를 잃었고, 남편을 잃고 세 아이의 어머니 산 76세 어르신은 자신을 위해 살아볼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을 잃었다. 그들은 내게 자신의 아픔을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당신처럼 상실이 주는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나도 당신이 걷는 그 광야를 걸었으며, 당신처럼 광야를 지나는 중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혼자 그 광야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들의 아픔을 들으면서 마음이 아팠지만 동시에 나는 위로를 얻었다. 타인의 아픔을 통해 위로는 얻는 내가 위선적이고 이기적으로 느껴져 부끄럽지만 솔직히 나는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것에 위로를 받았다. 주식을 해서 천만 원을 잃고 낙심했을 때, 누군가 나타나 ‘오백만 원을 잃었다’ 하면 조금 기운이 난다. 그 뒤 다른 누군가 ‘천만 원을 잃었다’ 하면 ‘나도 그랬다’며 죽음의 계곡에서 동지를 만난 듯 기쁘기까지 하다. 그리고 누군가 “난 일억을 잃었다”라고 말하면 자신의 상실은 너무도 다행스럽고 낙심했던 마음의 고통은 작아지기 시작한다. 비유가 우스울지 모르나 내 마음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나의 상실과 슬픔에만 집중되어 있을 때, 나 혼자 광야에 버려져 혼자 헤매고 있다고 생각될 때 나의 슬픔과 고통은 거대해 보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상실과 아픔을 마주할수록 나의 고통과 슬픔이 점점 작아졌다.  ‘고통의 주인공이 왜 나인가? 왜 나여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은 ‘왜 내가 아니어야 하는가? 왜 나여서는 안 되는가?’로 바꾸어 자문하게 되었다.  나에게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고백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 자신이 느끼는 슬픔과 고통의 사이즈를 줄이려면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깊이 마주해야 한다.”      


사별 후 한동안 나는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다. 동떨어진 사별의 감정을 갖고 일상적인 대화에 참여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타인의 슬픔을 대면하고 위로를 얻은 후 나는 사람들을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상처 받을까 두려워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은 내 마음을 설득시키고 달래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기로 했다. 타인의 슬픔을 통해 내 슬픔을 줄여보려는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마음을 품고서라도 나는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마음을 기울이고 싶어 졌다.   


그가 떠난 후 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분들에게 위로를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로와 안부를 묻는 횟수는 줄고 있지만,  그동안 내가 받은 위로를 생각해 보면 나는 그 1/10도 누군가의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내가 준  것보다  받은 것이 크니 나는 세상을 향해 빚진 자가 되었다. 마음의 빚은 내게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아무 때나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되갚기가 어렵다. 언제쯤 나는 내가 진 빚을 청산하게 될까?      

사별 후 나는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위로의 방법을 배웠다. 상실을 통해 얻게 된 첫 번째 배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밥 한 끼, 전화 한 통, 문자 한 줄, 여행, 따뜻한 포옹... 사소한 그 모든 위로가 내가 상실의 고통을 견디도록 힘을 실어 주었으며 언젠가 나 또한 누군가의 위로가 되어야 한다는 도전을 주었다.    


나는 아직 상실의 슬픔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상실의 광야를 건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힘을 내어서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을 계획해 보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준 위로에는 내가 다시 날아오르기를 바라는 소망과 기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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