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디디아 Aug 28. 2020

사별 후 500일을 돌아보며

사별 500일이 지난 후 나는 그 500일을 찬찬히 되돌아보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과 감정이 있고,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선명한 시간과 감정도 있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500일의 내가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어떤 대답을 들을지 짐작이 된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의 무거운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인 데다,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살아온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뛰어봐야 벼룩인지 사별 후에 겪게 되는 감정과 증상에서 나 또한 자유롭진 못했다. 500일 동안 나의 상실감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로 진화했다. 죽음 앞에 망연자실했으며 허망하고, 슬프고, 화나고, 무겁고 우울했다. 불안과 막막함으로 삶이 두렵고, 상대적 박탈감에 초라해졌으며 그리움으로 외로웠다. 한 동안 나는 깊은 잠과 음식의 맛을 누릴 수 없었다. 머릿속은 많은 질문과 생각들로 복잡했으나 화상을 입은 뇌처럼 정신은 온전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돌아본 사별 후 500일은 내 인생의 특별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땅에서 남편의 삶은 마감되었지만, 나와 아이들에겐 그의 부재와 상관없이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삶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에게 “아빠 없이도 우린 괜찮을 거야! 우린 잘 살아갈 거야!”라고 말하기 위해선 엄마인 내가 먼저 웃어야 했고, 괜찮은 평범한 하루를 살아낼 수 있어야 했다.  내가 괜찮아져야 아이들은 안도할 것이며, 하루아침에 아빠를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고 일상을 살아가리란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나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서, 나를 사랑하고 염려함으로 나로 인해 마음 아픈 이들을 위해서, 내가 과부가 되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무너졌을 하늘의 엄마를 위해서, 그리고 죽은 남편을 위해서 나는 괜찮아져야 했고 혼자서도 잘 살아가야 했다. 유쾌하고 평범한 하루를 사는데 때로는 내가 가진 온 힘을 끌어 모아야 가능했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며 내 마음과 씨름한 날도 많았다. 하루씩만 살아보자던 마음으로 30일을 살아내고 나니, 100일이 가고 1년이 지나갔다.   어느 날 맥주 한 잔을 나눠 마시며 친구가 말했다.


“숙아, 언젠가 내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사별의 시간을 살아야 할 때가 오면 나는 지금의 너를 생각할 거야. 그러니 지금 네가 보여주는 걸음은 내가 걷게 될 걸음이 될 거야.”      


우리는 마주 웃으며 ‘멋진 한 걸음’을 위해 건배했다. 내가 40년 전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사별 후 시간을 살아가 듯, 멈춘 것 같았던 사별 후 나의 시간은 한순간도 멈춘 적 없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기록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젠가 사별로 인한 상실의 시간을 살아야 할 때 지금의 나를 떠올릴 것이다. ‘자기 스스로 눈물겹게 살아 본 인생만이 자기 인생이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는 헝클어진 감정들로 뒤죽박죽일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눈물겨운 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일찍 부모를 여의었고 가난했던 나는 세상 기준으로 완벽한 조건의 넉넉함보다는 결핍에 익숙하다. 어떤 이들은 부모를 잃고 친구를 잃었던 나의 사별 경험이 지금의 사별을 견디는 힘을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경험은 가장 확실한 교육이니 사별 후  감정 변화를 예측하고 그 감정을 다스리며 깊은 슬픔에서 벗어나는 법을 나는 무의식 중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슷한 이유로 반복적인 상실을 다시 겪게 되면 새로운 상실은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던 과거 상실의 기억을 자극함으로 상실의 고통은 더 크게 다가오고, 사고와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 또한 커지게 된다. 지하철 사고를 겪었던 사람이 다시 지하철 사고를 겪게 된다면, 도피하는 요령을 알겠지만  ‘외상 후 장애’는 더 심해질 가능성이 높은 것과 비슷하다. 상처 입은 인생길의 부상자가 ‘다시 또 내가 다쳐야 하는 거야? 왜 또 나야?’라는 말하고 싶은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을 부인할 순 없다. 그러니 과거 사별 경험이 지금 나의 슬픔과 고통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교육효과가 클지 외상 후 장애가 더 클지는 살아봐야 알겠다.   


사별 후 500일을 살아가는데 내게 도움이 된 것은 결핍된 삶으로부터 내가 배운 것이다. 나는 가난한 집 아이였고, 가난한 동네에 살았으며 주변엔 항상 결핍이 있었다. 하지만 용케도 나는 결핍에 집중하기보다는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놀이와 행복을 만들 줄 아는 가족과 친구들 속에서 살았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매우 특별한 훈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고향의 겨울은 춥고 눈이 많은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두꺼운 겨울 외투나 정교한 놀이기구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단지 눈만 많았다. 우린 많은 눈에 집중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눈송이를 쫓아 눈 내리는 들판을 달리고 또 달렸다. 눈싸움, 가장 큰 눈사람 만들기, 눈 미끄럼틀 만들어 빙판처럼 윤내기, 비료 포대로 눈썰매 타기, 이글루 만들기 등 많은 눈과 친구들만 있어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해서 두꺼운 겨울 외투나 놀이기구가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형을 살 돈이 없으면 인형을 만들었고, 양장점과 한복집에서 얻은 자투리 천으로 인형 옷도 만들었다. 만드는 과정이 배움이고 놀이였고 성취의 기쁨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가난해서 장학금이 필요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를 했고, 그로 인해 볼품없고 가난한 아버지 없는 아이는 작아도 똑똑한 아이로 통했고 자존감은 높아졌다. 결핍은 나를 초라하고 움츠려 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결핍은 나를 도전적이고 창조적이게 만들었고 삶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내 삶은 항상 결핍이 있었지만 나는 그 결핍에 집중하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것과 기회를 주목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함으로 결핍에 기죽지 않고 행복해지는 법을 익혔다.  



인생은 어머니의 탯줄을 끊는 순간부터 이별과 상실의 연속이고 내가 남편을 잃음도 그 연속선상의 하나겠지만, 22년의 결혼생활에 길들여진 나에게 남편의 죽음은 큰 결핍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가 없음으로 내가 누릴 수 없는 것들이 떠오를 때면 가슴이 저며 오는 통증을 느낀다.  이제 남편은 내게 새로운 결핍이 되었다. 상실 후 새로운 결핍에 대해서 나는 내가 알던 방식으로 대응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그와 함께한 과거를 주목하기보다 나의 현재와 미래를 주목함으로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 죽은 그에게 집중하기보다 살아있는 나와 내 사람들에게 집중함으로 새로운 추억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고 눈물 대신 기쁨으로 웃는 시간을 만들어 간다. 사별로 인해 내가 잃은 것보다 사별로 인해 내가 얻은 것에 집중함으로  상실의 광야에서 신이 나를 위해 감춰 둔 선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언제나 그렇듯 신은 내 삶에 결핍을 만드심으로 교만치 못하게 함과 동시에 나를 연민하심으로 내게 힘과 위로를 줄 무언가를 선물처럼 남겨 두신다. 매일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주목하고 무엇에 집중할 것인지는 나의 선택이고 내 선택은 내 삶을 이끌어 갈 것이다. 내가 무엇에 집중하든 내 결핍이 사라지거나 완전히 잊어지는 건 아니지만 나는 신 내게서 거두신 것보다 신 내게 허락하신 것에 주목하고 집중하므로 상실의 광야에 신이 감춰둔 선물을 모두 찾아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