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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디디아 Aug 27. 2020

내 안의 가을

나는 가을 산을 좋아한다. 똑같이 입고 있던 초록을 벗어 버리고, 하나하나 자기만의 속살을 드러내며 모두의 다름을 보여주는 계절이 가을이란 생각을 한다. 가을 산을 오르다 보면 산을 이루는 색이 몇 가지나 될까 세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빨강, 노랑, 초록, 갈색, 검정, 회색, 백색, 파랑..... 세다가 세다가 색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를 모르는 나의 무지함으로 포기하고 만다. 셀 수 없이 많은 색들이 뒤섞여 일부러 조화를 이룬 것이 아님에도 서로의 다름은 풍요로운 조화가 되고, 그 어느 순간보다 아름답고 거대한 꽃밭이 되는 순간이 가을이 아닐까 싶다.     

나는 문득 사별 후 내 감정이 가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은 대부분 다양한 감정을 품고 산다. 나 또한 그런 보편적 인간 중 하나다. 큰 슬픔을 겪은 후 내 감정의 다양성과 기복은 이전보다 훨씬 편차가 심하다. 내 기분은 시시때때로 변한다. 어떤 때는 초단위로 변하기도 한다. 비교적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을 조절할 수 있으면서 지극이 이성적이다가도 사소한 자극 하나에 ‘눈물 뚝!’ 슬픔을 참을 수 없게 되고, 다음 순간 감정이 격해지면서 평정심은 산산조각이 난다. 내 평정심의 노력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사소한 자극은 예상되지 않아 피할 수 없고,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노랫말, 음식, 오래된 사진 한 장, 동영상, 목소리, 영화, 사소한 기념일, 떨어지는 낙엽 한 장, 기쁜 일, 웃긴 이야기, 국화.....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아무 걱정 없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순간을 즐긴다. 가을 산의 아름다움, 따뜻하고 달콤한 차 한 잔, 막 지은 밥 한 숟가락, 곁에  있는 친구와 가족들 때문에 마음이 즐거워진다.     

그러니 난 시시때때로 변하는 수많은 감정에 뒤죽박죽인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다. 

기분이 왜 이처럼 심하게 왔다 갔다 하는지, 내 정신이 멀쩡한 건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내 마음은 형형색색의 방울토마토가 담긴 상자 같아서 어떤 감정은 달콤하고, 어느 감정은 새콤하고, 어느 감정은 아무 맛도 없거나 떫고 씁쓸할 때도 있다.

까르르 웃다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커이 커이’ 우는 나에게 “드디어 네가 맛이 갔구나! 그래 드디어 네가 미쳤군.”하며 혼자 말을 건네기도 한다. 온갖 형태와 색깔을 품은 가을을 보면서 그 가을이 내 안에도 있음을 본다. 어찌 보면 다른 것들이 마구 뒤섞여 순간순간 달라지는 혼돈이지만, 그것들은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기쁨의 반대말이 슬픔이 아님을, 눈물의 반대말이 웃음이 아님을, 불행의 반대말이 행복이 아님을 깨닫는다. 기쁘면서 동시에 슬프고, 눈물을 가득 담고도 환히 웃을 수 있으며, 불행하다 여겨지는 시절에 행복감에 눈물겹기도 하다. 사람을 잃고 후회하면서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 지고 그럴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평정심을 잃고 내 안의 무수한 감정이 뒤섞여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내 감정의 불꽃놀이를 본다. 나는 내면의 감정들을 억누르지 않고 풀어놓음으로 뜨겁게 붉고, 차갑게 파랗고, 유치하게 노랗고, 어둡게 회색인 감정을 마주하고 그것들이 ‘나의 것’ 임을.. 그 자체로 ‘나’ 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예쁘다!’


그 모든 연약한 감정들로 뒤죽박죽이 된 내 마음이 나는 예쁘다고 느낀다.

눈물을 머금고 환히 웃고 있는 내 표정이 우스꽝스럽지만 나는 그런 표정의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못생겼는데... 근데 너 참 예쁘다!’      


상실은 내 삶과 내 감정과 이성을 산산이 조각냈다. 그 조각들을 원래의 모습으로 붙이려면 당연히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조각나기 전 예전의 내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의 내가 되지 못하는 것이 이젠 두렵지 않다. 쉽게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이성과 단단한 평정심의 갑옷으로 무장되어 있던 어느 시절보다 균일함도 없고 모양도 없는 연약한 감정들이 조각조각 이어진 얼룩진 조각 천으로 벌거벗은 마음을 두르고 있는 지금의 내가 어느 시절보다 생동감 있고 예쁘다.      

1년의 사계가 돌고 돌아 세월이 되고 한 사람의 인생이 되듯

나는 감정이 돌고 도는 계절을 살아보고 싶어 졌다. 

어느 때는 다시 소생하는 봄처럼. 

어느 때는 뜨거운 여름으로. 

어느 때는 찬란한 가을처럼.

어느 때는 침묵함으로 가난해지는 겨울로.


상록수가 아니라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초록에서 붉게도 노랗게도 변덕스러운 단풍나무처럼 나는 그렇게 변덕스러운 나의 감정을 용납하고 갈팡질팡하는 나를 사랑해보고 싶어 졌다.      


곱게 묽든 단풍잎 한 장 주워 책갈피에 꽂아 두던 어느 날처럼 오늘은 내 마음의 알록진 가을 속에서 눈물 나게 고운 단풍잎 같은 마음 하나 추려서 일기장에 곱게 꽂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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