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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디디아 Sep 25. 2020

아버지의 죽음

어느 청년의 사별이야기

   이 글은 19살에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청년이 준비 없이 겪게 된 사별 후 감정을 글로 옮긴 것입니다. 대부분 청년기의 자녀들은 사별 후 슬픔과 상실감을 가족을 비롯해 타인에게 잘 표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괜찮거나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일찍 배우자를 잃은 고통과 슬픔만큼이나  일찍 부모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도 매우 클 수 있고, 사춘기와 청년기의 자녀도 공감과 위로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바로 눈물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아빠가 사망했다는 엄마의 말을 들었을 땐 말문이 막혔다. 믿기지 않았을뿐더러 상황 파악도 잘 되지 않았던 나는 한동안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 속에서 나는 토요일 그 이른 아침에 아빠가 왜 사고가 나셨는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에게 화가 난 건지 대상이 명확하지 않았지만 나는 화가 났다. 주위에 있는 무엇이든 주먹으로 치고 싶었다. 기숙사에 도착해 한국으로 바로 떠나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뱉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대충 학교에 설명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몇 통의 전화가 왔지만 아무 말도 하기 싫었기 때문에 받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아빠의 죽음이 믿기질 않았다. 그냥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나니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아빠 사진을 보니 눈물이 났다. 아빠를 다신 못 볼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환승할 비행기를 기다렸다. 아직도 아빠의 죽음이 완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아빠의 사망일에 일어난 사고, 사망자를 검색하던 중 우리 가족이 다니는 교회의 성도 사망자 정보 페이지를 찾게 되었다. 거기 아빠의 이름과 장례 관련 소식이 있었고 그걸 보고 난 후 난 아빠의 죽음을 실감했다. 또다시 울었다.     


아빠의 부고를 들은 지 30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보통 유학 중인 내가 한국에 돌아오면 언제나 아빠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셨는데 그날은 아빠의 친구인 유 집사님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엄마가 나를 껴안고 통곡하셨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는 울지 않았다. 슬퍼하는 엄마와 누나를 보니 마음이 찢어지고 아빠와 이런 상황에 또다시 화가 났다. 난 사실 울고 싶었다. 아빠가 웃고 있는 사진 앞에서 울고 싶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조문객이 거의 다녀가신 늦은 밤이 되어 한산해졌을 때, 엄마가 나에게 와서 얘기하자 그제야 엄마품에 안겨 울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위로의 말을 전하고 갔지만 아무런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 상황이 너무 억울했다.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일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배운 적이 없다. 엄마와 누나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갈팡 질팡하는 내 마음조차 챙기는 방법을 몰랐다. 그런 내가 바보 같았다.


아빠가 돌아가신 그해 여름, 나는 처음으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스스로 돈을 벌었다. 그 월급은 시간이 좀 지나서 가을 학기가 시작하고 입금되었는데, 그 돈으로 결혼기념일에 부모님께 멋진 가을 옷을 사드린다고 하자 아빠는 너무 좋아하셨다. 아빠에게 받은 많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지만, 아빠는 결혼기념일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내가 옷 한 벌을 사 드리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아빠와 최근에 주고받은 문자를 확인했는데, 아빠한테 마지막으로 연락한 지 꽤나 시간이 지나 있었다. 미치도록 후회가 되었다.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전화조차 자주 드리지 못한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아빠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는데 나는 아무것도 돌려드린 게 없었다. 나는 아빠에게 많은 것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빠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왔다. 아빠의 차가운 주검을 내 손으로 만지고  아빠의 유골함을 내 손에 들고 산을 올랐지만 아직도 아빠의 죽음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집에 오면 아빠가 반겨 줄 것 같았다. 아빠가 없는 집에 들어가는 허전함이 너무 커서 집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빠가 없이 살아가기엔 내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됐다. 아직 아빠에게 배우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고, 나는 아직 아빠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이런 아빠에 대한 생각을 나는 그냥 내 안에만 묵혀 두었다. 남들에게 아빠에 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빠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팠고 마음이 불편했다. 남들이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도 싫어서 나는 아빠의 죽음과 그와 관련된 내 감정을 언급하거나 솔직히 드러내기 싫었다.



시간이 지나고 내 마음이 진정되어가자 엄마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빠가 돌아가셨지만 나는 엄마를 바라보며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아빠와 모든 것을 함께 하던 엄마는 누나와 나마저 떠나면 어떻게 살까?라는 걱정이 되었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하면 나도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장례가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도 한동안 돌아가신 아빠와 혼자 남겨진 엄마 생각에 많이 울었다. 엄마 곁에 머물며 엄마를 위로해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했지만, 우리는 각기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야 했고 나도 어딘가로 정신을 돌리지 않는다면 미칠 것 같았다. 아빠가 가고 나서 내게 남은 엄마의 존재는 더욱 커졌고 소중해졌다. 일단 엄마가 행복해졌으면 했다. 아빠의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 엄마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아빠의 죽음 이후 엄마에게 더욱 잘해주려고 노력했는데, 본의 아니게 엄마를 걱정시키고 마음에 상처를 준 적도 많은 것 같다. 꼭 상처를 주고 나서야 내가 왜 그랬지 라는 생각이 들어 후회했다. 내 이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배웠으며 전보다 더 바쁘게 지내며 꿋꿋이 살아줬다. 만약 엄마가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다면, 나와 누나를 비롯한 가족들 모두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씩씩하게 살아주고 여전히 밝게 웃어주는 엄마에게 한없이 고맙고 나는 그런 엄마를 한없이 사랑한다.


아빠가 죽고 나서 나는 혼자서 많이 울었다. 공부하면서도 생각나면 울고, 아빠 사진을 보고 울고, 아빠가 생각나면 울었다. 아빠는 완벽함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나에게는 참 다정하고 좋은 아빠였다. 그렇게 좋은 아빠였기에 더 슬펐다. 우리를 두고 그렇게 빨리 가버린 게 원망스럽지만, 그동안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들을 많이 만들어 줘서, 우리를 더없이 많이 사랑해줘서 아빠한테 고맙다.


나는 아빠의 죽음을 겪었지만, 아직은 가족의 죽음을 겪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가 아빠의 죽음과 상실의 감정을 겪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네었지만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말은, “네가 이렇게 잘 자라준 것만으로도 너는 아빠한테 정말 자랑스러운 아들이야. 너는 이미 아빠에게 큰 기쁨이고 자랑이었어. 그러니 네가 아빠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고 자책하지 마”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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