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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은 Dec 15. 2022

다. 카. 포.

나의 기쁨 우리의 소리#3

망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첫 무대 영상을 보고 잠이 화들짝 깼다.


"첫 무대는 누구나 다 있는 법이죠. 이런 작은 무대로 경험을 쌓아야지 내년에 큰 공연을 할 수 있어요. 편안하게 나를 따라 부르세요." 큰 배의 함장 같은 든든한 선생님. 초보인 우리에게 한없이 친절하셔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생님을 따라가고 싶어졌다. 공연 준비곡으로 판소리는 아직 어려우니 민요 함양 양잠가를 선택하셨다. 집중 레슨이 시작되었다.  떨림, 애절함, 꺾임, 내뱉음, 구슬픔. 한마디 한마디 특색을 살려서 참새 새끼처럼 다박 다박 가르침을 받아 삼켰다. 혼을 담아 곡을 연기하는 배우이다.




공연을 하는 날.

살풀이, 사물놀이, 부채춤, 버꾸 춤. 공연 준비하는 이들로 대기실은 분주했다.  가사 발림(몸동작, 부채 동작)을 체크하며 순서가 오기를 기다렸다. 선생님과 또 다른 초보 단원이 있어서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남도민요 함양 양잠가.

심호흡을 하고 무대 위에 올랐고 반주가 시작되었다. 갑자기 귀에서 왕왕왕 소리가 들리고 나를 보고 있는 수십 개의 눈빛에 압도당했다. 혼미한 정신에서 의식이 깨어나는 순간.

앗!

첫 소절을 놓쳤다.

정신을 차리고 선생님을 따라 노래를 부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가사를 줄줄 읊었다. 여태 배움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꺾임, 애절함, 구슬픔, 떨림. 4분여의 시간은 무한대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느낌이었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래를 마치고 어떻게 내려왔는지 인사를 제대로 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선생님은 식사를 준비했다고 하셨지만 다른 공연팀과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이미 가슴에 공깃밥 수백 덩어리가 얹힌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관객은 나의 재롱잔치를 보러 온 것이 아닌데 4분여의 아까운 시간을 보냈다. 무대 위에 오르는 사람으로  관객에게 예의를  다하지 못한 자신이. 실수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아이가 구구단을 배울 시기에 2 곱하기 3이라는 문제만 나오면 틀렸다. 답란에는 항상 5. 빨간색으로 체크를 해두면 '아!' 피식 웃으면서 답을 정정했다. 그 문제만 유독 반복적으로 틀렸다. 그때마다 '야! 너 바보 맞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내가 딱 그 상황이다. 바보라는 말이 제격인. 집에 돌아오는 내내 불만족스러운 첫 공연에 괜스레 애꿎은 운전대를 쾅쾅 두드렸다.  


화장을 지우며 엉망 된 기분까지 말끔히 지우자.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 다른 공연은 훌륭했잖아. 관객들은 60분 공연 중에서 4분 정도 어설픈 무대를 보고 기분을 망쳤다며 나처럼  우울해하지도 않을 텐데, 자책하지 말자. '오늘 그 자리에 계신 분들 정말 감사해요. 미흡한 제게 4분을 주셔서. 전 240초 동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다음 공연에 오시면 최고의 무대를 선물로 드릴게요. 꼭 다음 제 공연에서 만나길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이 실수하면 '괜찮아'라고 쉽게 말해주면서 내게 못할 이유가 없잖아. 자신을 스스로 돕기로 했잖아. 그래 친절을 베풀자. 거울 속의 나에게 스스로 다독이며 '가사라도 읊었으니 다행이야 ' 위로를 해 주었다.

한결 나아진 마음으로 무사히 저녁시간을 보냈다.



4년 전 동화구연을 배우고 구연 시험 준비를 했을 때다.

A4용지 한 장 분량의 빽빽한 동화내용외워서 이야기하듯이 등장인물의 특색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구사해서 구연을 해야 했다. 선생님은 합격이 될 때까지 봐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지만 이 부담감을  한 번만 감당하고 싶었다. 대본에서 3회 이상 틀리면 탈락이기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조사 하나하나를 확인하며 주방 싱크대 앞, 조리대 앞, 냉장고 문, 화장실 문, 책상 위, 운전대, 주머니에. 수십 장 쪽지를 만들어 동선마다 붙였다. 멍 때리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 30일간 온통 머릿속에는 구연뿐이었다.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을 때도 구연을 했다.


수십 개의 눈이 한 곳에 몰렸던 그날. 그 순간.

당당하게 시험 무대에 올랐다. 어깨를 펴고 양손에 계란을 쥐고 있는 느낌으로 동그랗고 가볍게 주먹을 쥐고 팔을 자연스럽게 내린다. 바지 옆 선 위치에.

자연스럽게 구연을 시작했다. 물 흐르듯 술술 하다가 내용의 막바지 4분의 1 정도가 남았을 때 쿵쿵 빠르게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들렸다. 손안에 계란은 껍질이 깨지고 노른자마저 툭 터져서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흐를 듯이 주먹을 꼭 쥐었다. 틀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꽉 쥔 주먹으로 버텼다.  결국 단박에 시험을 통과됐지만 이후 심하게 끙끙 몸살을 앓았다.




공연한다고 애쓴 하루를 일찍 마무리하려는데 '카톡'

국악단 단체 톡방의 메시지다. '오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 여러 장의 무대 사진과 무대 영상이 올려져 있었다. 무대 영상의 재생 버튼은 호기심에 져 버린 판도라의 상자였다.

벌떡 잠이 깼다.

첫 소절을 놓친 어정쩡한 자세, 4절 후렴부터 혼자 반대로 한 발림. 다들 오른쪽으로 몸을 흔드는데  왼쪽으로 몸을 흔드는 초록색 치마가 도드라져 보였다. 혼자만 실수한 것이 아닐 거야. 애써 다른 이의 실수를 찾으려고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망했다. 잠이 오질 않는 밤이다. 성공한 무대도 아닌데 앓아누울 만큼 심한 몸살이 올 것 같다.

금요일 수업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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