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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은 Dec 13. 2022

무의식이 흐르는 대로

나의 기쁨 우리의 소리#1

판소리 초보 신규 회원 모집


독서지도사 자격증 과정 마지막 수업을 하던 날.

수업을 마치고 접수창구 옆을 지나가는 찰나 가을 학기 전단지에 파란색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이 흐르는 대로 몸이 접수창구를 향해 스스륵 간다. 혀와 입이 움직이며 언어를 뿌려댄다.

"판소리 신규 회원반 여석 있어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한 자리 남았네요. 10명 정원인데 9명 접수됐어요. 등록하시겠어요?"

한 자리 남았다. 나를 위한 것이다. 옆에 아무도 없지만 누가 새치기를 할세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수강신청서를 작성하기도 전에 지갑을 꺼내 카드를 내밀었다. “수강 신청할게요."


그날 저녁. 저녁밥을 준비하면서 정신이 퍼뜩 들었다. 판소리에 관심이 있거나, 즐겨 듣거나, 좋아하거나. 아무런 해당 사항이 없다.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듣는 비중이 높은 사람이고  흥이 넘쳐서 주체할 수 없는 그런 끼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내가 왜 판소리 수업을 신청했는지 도무지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가을학기 개강 첫날이다. 호기심이 꽉 찬 눈으로 강의실 문을 살포시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단상에 북과 장구와 마이크를 정리하는 선생님의 모습과 나이가 지긋한 수강생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문을 열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밝게 씩씩하게 경쾌하게 볼에 바람을 넣으며 애써 긴장감을 감춘다. "안녕하세요." 떨림과 기대감으로 강의실에 한 발을 내밀었다. 판소리 선생님과 초보 회원인 나와 가느다란 인연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선생님은 사단법인 우리 소리보존회라는 단체를 운영하시고 여러 학교에 출강을 겸하고 계신다는 소개를 하셨다. 또한 우리의 향후 계획은 지역 내 문화재단에서 개최하는 각종 행사 무대에서 공연할 예정이라고 하셨다. 초보라는 말에 이끌려서  왔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질문 있어요. 꼭 무대에 서야지만 여기서 판소리를 배울 수 있나요. 전 무대체질이 아니에요. 초보 신규반으로 알고 수업을 등록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점잖은 어르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선생님의 말씀만 듣고 있었다. 마치 그러려고 수강신청을 한 것처럼. '수업이 끝나면 수강취소를 해야겠다.' 시계를 보며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   


       



"시간이 촉박해서 어서 노래를 배워야 해요. 책상 위에 놓인 프린트물을 보세요."

남도민요 함양 양잠가, 수궁가 중 범 내려오는 대목. 책상 위엔 노래 가사가 적힌 용지 두장이 다소곳이 놓여있었다. 첫 수업에 배울 곡은 남도민요 함양 양잠가다. 선생님은 남도 민요의 특징과 함양 양잠가의 노랫말 설명을 해주셨다. 아낙네들이 누에를 먹이고 실을 뽑으면서 부르는 노동요. 처음 듣는 노래기도 하지만 가사에 ‘죽어’라는 단어가 나오니 섬뜩하면서 곡조는 애절하다. 너는 죽어 OO가 되거라 나는 죽어서 OO이 될거나. 너는 누에를 가리키는 것이니 누에를 위한 장송곡 같기도 했다. "후렴구 에야 디야 에헤야. 떨고, 뻗고, 꺾는다. 이것이 중요하니 기억하시고 부릅 니다."

    

아아아아- 아아- 아 하 하-

목을 푼 후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먼저 선생님이 첫 소절을 부르신다. 나는 또 무의식이 흐르는 대로 휴대폰을 꺼내서 선생님의 목소리를 녹음하려고 녹음 기능을 작동했다.  "초보자는 소리를 내는 것이 힘들어요. 음정 박자 생각하지 말고 틀려도 괜찮으니 소리를 밖으로 질러버리세요." 선생님이 치는 북장단에 맞춰 우리는 한 소절씩 따라 부른다. 음정 박자가 맞는지 안 맞는지 의식하지 않고 힘껏 내질렀다. 오늘 새로이 ㄱ,ㄴ, ㄷ... 한글을 배우는 아이처럼. 처음 듣는 민요이기에 선생님의 선창을 집중해서 들어야 했다. 그다음 단전에 힘을 주고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 내 귀에도 쟁쟁하게 들리는  목소리.

'어랏. 왜 이렇게 속이 후련하지.' 마음을 어지럽히는 잡생각이 사라져 속이 텅 비어 깨끗해진 기분이다.

배가 고프다.   

       

"오늘 첫 수업 수고하셨어요. 오늘 배운 것을 연습해오고 다음 시간에는 '범내려온다' 배울 겁니다."

60분 수업이 6분처럼 느껴졌다.

"선생님. 저는 판소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오늘 배우는 것이 처음인데 이런 사람도 무대에 설 수 있을까요?" "그럼요. 충분히 가능해요. 결석만 안 하면 됩니다."

선생님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인자한 웃음에 빠져들었다.



    

유년기를 보낸 작은 시골 마을.

새해를 시작할 때나 농사를 시작하기 전  중요한 절기마다 마을 어른들은 사물놀이로 집마다 다니면서 그 집의 무탈함과 복을 기원했다. 저 멀리서 들리던 꽹과리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우리 집 대문을 통과해 마당에서 부엌으로 쨍쨍한 소리가 이동했다. 무의식에 잠재된 익숙하고 소란했던 꽹과리와 북소리의 풍경이 나의 의식을 깨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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