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시간인지 모른다.
몇 년 동안 뉴욕을 마음에 품고 한 달 가까운 시간을 이곳에서 보낼 수 있기를 바라왔다. 아니, 고대해 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곳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나의 고갈된 에너지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던 유일한 곳, 내 앞의 다양한 가능성으로 설레고 빛났던 그때의 나를 조금이라도 되찾기 위해서는 이곳이어야만 했다. 나의 20대 후반에 일 년 넘게 지내며 더없이 사랑했던 곳에 이번에는 한 달 넘는 시간을 계획하고 왔다.
꼭 여름에 뉴욕에 오고 싶었다. 내가 겪어 보지 못했던 뉴욕의 활기가 궁금했다. 초록빛 나무가 넘실대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더 큰 에너지로 활보하고 공원에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여름의 아름다움을 찬탄할 이곳이 아주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 안에 함께 있어 보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이곳이 가장 빛날 여름에 나는 미국 서부에서 시간을 보냈기에 나는 뉴욕의 여름을 알지 못했다.
15년 만에 온 이곳은 여전했다. 이렇게 그대로라니. 더 높은 마천루들이 꽤 올라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기억하는 뉴욕의 모습을 모두 품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빨리 움직였고, 활기찼고, 노란 택시는 빽빽한 길을 잘 흘러 다니고 있었다. 지하철역의 훅 끼쳐오는 열기도 여전했다.
역시 이곳에서는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가능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하나 신경 쓸 것 없이, 오직 나. 내가 하고픈 것을 마음껏 하고 좋아하는 것을 누리고, 내게 집중해 줄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툴툴거리는 지하철의 걸음을 따라 그동안 접어둘 수밖에 없었던 나의 생각도 조금씩 깊어졌다.
도시의 빽빽함과 복잡함을 힘들어하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 뉴욕은 의외로 가장 편안하고 흥미로운 곳이다. 이유가 뭘까? 무엇보다도 이 도시와 이곳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역동성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두 물줄기가 모이는 곳은 에너지의 크기가 훨씬 크다고 한다. 기운적으로 아주 좋은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라는 이야기다. 양 옆에 이스트 리버와 허드슨 리버를 둔 뉴욕 맨해튼은 당연히 그 땅의 기운 자체로도 좋은 에너지를 뿜어낼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게 되고, 또 가장 멋진 삶을 찾아오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멋짐에 끌려 계속해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가장 큰 에너지와 주파수가 맞는 가장 밝고 큰 에너지를 가진 이들이 오다 보니, 이곳의 에너지는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자꾸만 커지는 것 같다.
뉴욕은 의외로 아주 거칠고 와일드하다. 내게 뉴욕은 세련되고 시크하면서 동시에 역동적이었던 곳으로 기억되었는데, 알고 보니 이곳은 더없이 와일드하고 야생적이었던 곳이었다. 내가 그래서 뉴욕을 그렇게 좋아했구나 하고 비로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박상미 작가님의 책을 여행 초반에 계속 읽었다. 뉴욕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고 있는 그분은 뉴욕이 야생성이 살아날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감탄한 문장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곳이 인도와 뉴욕이다. 어쩌면 내 인생은 늘 뉴욕과 인도를 오가는 시간이었다.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라, 예술로 넘치는 세련된 도시와 오랜 이야기와 더할 수 없는 느긋함과 자연스러움이 당연한 나라. 나의 취향은 늘 두 가지 사이를 분주하게 넘나들었고 스스로를 다양한 면을 추구하는, 때로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기도 했다. 나를 설명하던 이 두 가지의 키워드가 이제야 만나지는 것 같았다. 둘의 뿌리는 사실 같았다. 역동성, 야생성. 내가 항상 끌리는 곳의 에너지는 이런 것이었다.
사실 뉴욕은 여름에는 인도 보다 더 지저분하고 정신없었다. 내가 그리워했던 뉴욕이 이랬나 싶을 만큼. 지하철 역의 숨이 턱 막히는, 당장 지상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지는 열기, 옆을 부딪치면서 헤치면서 지나가야 하는 타임 스퀘어의 인구 밀도, 뛰뛰빵빵 경적 소리와 항상 귀를 맴도는 앰뷸런스와 사이렌 소리와 그 다양한 소리를 뚫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
무엇보다도 여름의 빌딩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어컨의 열기와 합쳐진 후끈후끈한 한여름의 열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이라니!
미술관, 박물관은 늘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갔고,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것을 꿈꾸게 만들었다. 어느 서점을 들어가도 잘 갖춰져 있는 예술 관련 책은 책장 가득 꽂혀 있는 모습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했다. 예술이 이곳 사람들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스며 있을지 보여주는 것 같아 설렜고 또 부러웠다. 다른 곳에서 쉽게 보지 못할 책들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면 그동안 몰랐던 나의 시선이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다. 도시 전반에 당연한 듯 떠다니는 문화 예술을 존중하고 일상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특유의 분위기는 나를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르고 싶게 했다. 오래전 꿈꿨던 것처럼. 내가 살고 싶어 했던 이곳. 꼭 다시 돌아와서 살겠다고 다짐했던 그 마음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다름의 아름다움
맨해튼을 걷다가 문득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새삼스럽게 단 하나도 같은 건물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르데코 양식부터,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 현대식 건물까지, 그 사이로 빼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나지막하게 귀여운 벽돌 건물까지. 단 하나도 같은 높이와 형태의 건물이 없었다. 서로 앞 뒤로 겹쳐지고 다른 시대의 건물과 옆면을 맞대면서 아주 아름다운 실루엣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문득 이런 도시의 풍경을 보고 지내는 것 또한 이곳 사람들의 생각의 형태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름의 아름다움. 아니, 달라서 아름답다는 것. 하나하나의 개성이 빛나야 한다는 사실. 그래야 잘 어우러졌을 때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곳 사람들은 자연스레 습득할 듯했다. (물론 뉴욕 건물의 공중권과 같은 이야기는 유현준 교수님의 유튜브를 보면 아주 상세히 들을 수 있다.)
세상에 뉴욕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 있을까 싶다. 5분만 거리를 걸어봐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 이곳 뉴욕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민족이 공간 대비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시선이 나의 가치관에만 머물 수는 없는 곳이다.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나의 관점을 자연스레 확장시켜 줄 수 있는 곳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나는 뉴욕이 지니고 있는 다름과 다양성을 사랑한다.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뉴욕만의 특징은 이것일 거다.
이번에는 오래 머물 수 있는 숙소를 구하느라 예전에는 가보지 못했던 뉴욕 지역의 곳곳을 다녀 보았다. 얼마나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한 도시 안에 살고 있는지 더욱 실감했다. 뉴욕 도시의 블록을 지날 때마다 새로운 나라를 다니는 말이 틀린 이야기가 아니니까. 물로 그 안에서 엄청난 빈부 차와 젠트리피케이션, 그리고 각 민족의 바운더리를 쉽게 넘나들 수 없다는 또 다른 이면도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다양한 The Ciy는 오랜 전 그때처럼 나를 다시 설레게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