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 점심시간에 싸 온 도시락을 열었다.
도시락가방 안에 내가 넣은 적이 없는
천혜향 하나가 들어있다.
아마, 남편이 나 몰래 넣어줬다 보다.
남편은 4년 전, 50 중반 나이에 30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했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심히 회사생활을 한
남편은 두 번의 고배 끝에
'직장생활의 꽃'이라고 하는
임원승진에 성공했다.
나도 남편도, 가족 모두가 행복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난 후,
남편은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았다.
임원은 회사에서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다.
회사에서 매년 하는 계약을 해주지 않으면
바로 잘리는 거다.
은퇴란 때가 되면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우리 가정에 이렇게 급작스럽게
닥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덤덤하게 퇴직을 얘기하며
아무렇지 않은 티를 내려는 남편이
더 안쓰럽고, 속상했다.
회사가 원망스러웠다.
30여 년간을 매일 아침 6시에 출근하고
야근에, 술자리에, 기약 없는 퇴근을 하며
회사를 위해 그리 애를 썼건만,
이렇게 내치는가 싶어 야속했고
남편 마음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내 마음이 더 무너졌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남편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부부는
결혼 후 27년간 맞벌이 생활을 했고,
내가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에 근무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은퇴를 6년 앞두고 있다.
당장 먹고사는 걱정은 덜 수 있지만,
은퇴 이후에 대한 계획이 전무한 남편이
그 많은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주변을 보면 처음 한 두 달은 여행도 다니고,
6개월 정도는 출근 안 하는 생활을 즐기며, 운동도 열심히 하지만,
그 이후에는 무기력하게 생활하는 분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남편도 남들처럼 여행 다니고, 늦잠 자고,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여전히 남아도는 시간을 버거워하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집안일을 스스로 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총 5번에 걸친 이사는 온전히 나의 몫이었고
(남편은 이사 같은 개인적인 사유로
연차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집안일은커녕,
재활용분리수거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남편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재활용분리수거를 하더니,
세탁기 돌리는 방법을 묻고,
어느 때는 설거지도 말끔하게 해 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안일을 하나하나 늘려가더니,
평일에는 빨래, 설거지, 청소기 돌리기, 재활용분리수거는
온전히 남편 몫이 되었다.
처음에는 남편이 집안일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지적도 하고 잔소리도 해서 살짝 트러블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적으로 남편에게 맡기고, 아주 가끔씩 조언만 해 주고 있다.
남편은 집안일이 재밌고, 운동도 되고, 시간도 잘 간다고 좋아한다.
지내보니 나도 일단 몸이 편하고, 집안일이 많이 줄어서,
남편과 나 둘 다 만족스럽게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주말에는 내가 주로 집안일을 전담하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서 남편과 둘이 먹는다.
그런 남편이 가끔씩 내 도시락에
이것저것을 넣어주기 시작했다.
나는 평상시 간단히 야채와 과일, 요거트 등을
도시락으로 챙겨와서 점심을 해결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으면 속이 편하고,
도시락 싸는 일도 번거롭지 않고,
무엇보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라
3년 전부터 도시락을 싸 오고 있다.
내가 알아서 도시락을 챙겨 오는데,
가끔씩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꺼낼 때면
내가 도시락가방에 넣지 않은
음식이나 과일이 들어있을 때가 있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먹었으면 하는
맛있고 비싼 과일이나,
질 좋은 식품류가 선물로 들어올 때가 그럴 때다.
오늘은 얼마 전에 선물로 들어온
주먹만 한 천혜향을 남편이 나 먹으라고
도시락 가방에 넣어줬나 보다.
도시락 가방을 열 때 뜻밖의 먹거리가
들어있으면,
자동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남편의 사랑과 살뜰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건강 도시락에 남편의 사랑을 더한
멋진 점심도시락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