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꺼지고, 내 품에는 앙앙 우는 아이가 안겨 있다. 아이를 낳은 지 5개월.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자다가 문득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저게 누구지, 하며 깜짝 놀라 깬다.
나는 아나운서였다. 회사에 갓 들어온 내게 뉴스를 가르쳐주던 선배 아나운서와 연애를 했다. 예쁘고 잘생긴 가장 좋은 시절에,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했다. 회사를 다니며 틈틈이 해오던 대학원 공부도 끝이 났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야단법석을 떨던 행보에 비해 지금 내게는 엄마라는 직책만 덩그러니 남았다.
예쁘고 좋은 시절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꿈꾸고 싶었다. 이제 아주 어린 나이도 아니고, 아기까지 있는 아줌마가 되고나니 함부로 꿈꿀 수 없는 현실에 고민이 깊었다. 공부에도 다 때가 있다던 어른들 말씀이 요즘처럼 와 닿을 때가 없었다.
사실 내게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두 딸을 키워낸 훌륭한 엄마가 있다. 내게 아픈 손가락처럼 남아 있던 것은 엄마의 꿈이었다. 엄마는 우리 자매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훌륭히 키워냈지만, 정작 본인의 꿈을 말하는 것은 사치였다. 너를 키우느라 나에 대해서 고민해보지 못했다는 내 엄마의 말은 깊은 감사함이며 동시에, 한편으로는 내 아이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큰 부채감이었다.
나는 기꺼이 나의 꿈을 추구하기로 했다. ‘엄마가 공부를 더 해도 될까? 네가 다 자란 뒤에 공부를 해도 되겠지만, 엄마는 너와 이 시간을 함께 성장해나가고 싶어.’ 잠든 아기에게 속삭였다. 내 꿈이라고 표현했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이마저도 널 사랑하기 때문이다. 너를 키우느라 아무것도 못했다는 말이 상처로 남을까, 부담이 될까 싶어 공부를 선택한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하는 공부는 나도 처음이다.
그러나 진지한 다짐과 다르게, 엄마가 공부를 한다는 현실은 무척이나 우스운 장면들이었다.
어깨엔 항상 아이의 침이 범벅이 되어 있고 머리는 산발이다. 우는 아이를 둥가둥가 들쳐 업고 인터넷 강의를 켜놓는다. 1시간짜리 강의는 4시간을 켜놔야 겨우 다 듣는다. 중간 중간 멈추고 젖 주랴 기저귀 갈랴 어르고 달래야하기 때문이다. 1시간짜리 강의를 7시간동안 시청한 날도 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오후만 되면 남편에게 한 시간 단위로 재촉한다. ‘언제와?’ ‘나 30분이라도 앉아서 공부하려면 빨리 와야 하는데.’ 우리의 하루는 육아와 일과 공부로 릴레이 경주를 하듯 정신없이 지나간다.
겪어보니 엄마의 공부는 온가족이 함께해야 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남편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하고 싶고, 함께 해나가야 하는 일임을 분명히 해주었고, 참 고마웠다. 물론 모두가 발 벗고 나선다 한들 아이를 낳은 엄마만이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모유수유 같은 일은 누군가 대체해줄 수 없다. 두세 시간이면 젖이 차올라 아픈 가슴 때문에, 누가 봐준다 해도 멀리 나가 장시간 공부를 하긴 어려웠다. 분유도 있지만, 우리 아이는 극심한 젖병 거부를 보이는 아이라 어떻게든 모유수유를 직접 해야 한다. 그저 젖을 뗄 나이만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엄마로서의 시작, 그리고 엄마라는 역할에 밀려 내 이름을 잃지 않기 위한 시작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이 난리 속에서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깨달아 가는 중이다.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의 자식이며, 많은 이들이 엄마, 아빠가 된다. 그 사실이 특별한 게 아니라, 그 앞에 붙일 수식어가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공부하는’ 엄마, ‘도전하는’ 엄마처럼 우리는 우리를 설명해줄 수식어에 대해 노력하고 고민해야 한다. 내가 선택한 것은 공부하는 엄마였고, 너희를 키우느라 하고 싶은 일을 제 때 할 수 없었다던 우리 부모 세대의 고충을 답습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일이었다. 행해보니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이의 도움을 반드시 받아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족은 그 가장 원초적인 단계였다. 솔직하게 서로의 욕망을 드러내고 협력하며, 공동의 목표를 만들고 달성해나가는 즐거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내 아기는 아직까지 통잠을 자지 못하는 아이라, 나는 어제 밤에도 네 번이나 일어나 젖을 물렸다. 분명 고된 일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함께 해보기로 한 이 시작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줄지를 생각하면 용기가 생긴다. 시작은 그런 것이다. 설렘과 기대로, 고된 일들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나는 기대하며 시작하는 일이 가진 마법 같은 힘을 믿는다. 기꺼이 감수해내었을 때, 보상처럼 주어지는 달콤한 결실은 아가씨 시절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우리 가족의 것이다. 엄마의 공부를 지지한 우리 가족이 받게 될 배가 된 행복을 떠올리면 벅차다.
모든 엄마의 시작, 어떤 엄마가 되겠다는 결심은 사실 ‘가족의 시작’이다. 온 가족의 고군분투 속에, 마침내 다시 스포트라이트가 켜질 것이다. 그 조명 아래에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가족이 함께 서 있을 것이다. 이 세상 가족들의 모든 시작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