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나무 Jan 05. 2023

너 하염없다는 말이 먼 말인 중 아냐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이란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책 표지로 가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책이다. 들뜨지 않은 저녁 빛처럼 가만히 머물게 하는. 소설은 단편보다는 장편을 읽고 나서 이런 경우가 많은데 아무래도 마음의 농도는 시간 추종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장편 소설을 선호했다. 나의 소설 읽기는 신경숙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녀를 읽지 않지만.) 근래에는 조급한 마음으로 주로 단편을 읽어왔는데 아무래도 갈증이 있다. 작년(벌써) 초대박 베스트셀러들은 부러 외면하다 추종하는 유시민 작가가 추천했기에 정지아의 소설을 집어 들었다.


낄낄거리다 울다 금세 다 읽어버렸다.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책 표지로, 그리고 책날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소설가는 태어나는 것이었다.


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을 때는 이북 사투리가 잘 읽히지 않아 머뭇머뭇했었는데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 전라도 사투리는 잘 감겼다. 고향을 떠나오신 지 오래인 내 부모님은 사투리를 쓰지 않으시지만 어쩌다 집안 행사 때문에 남도에 가면, 아니 시가에 가도 전라도 사투리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아따, 그랬능가.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빨치산에 대해 정확히는 몰랐다. 지리산 자락에 숨어들었던 슬픈 공산주의자들, 소위 빨갱이라는 정도밖에는. 솔직히 말하면 관심이 없었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고 혹은 외면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그래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나의 우주는 딱 그만큼만인 것이다.


소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삶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와 관계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입체적으로 보여주기에는 '장례식장' 만한 공간적 배경이 없을 것이다. 많은 조문객 중에 아버지 고상욱과 국민학교 동창이었던 박 선생이 잊히지 않는다. 이해될 수 없는 우리의, 우리 생의 표상 같아서. 자신의 총알이 형제자매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자책감을 안고도 군인으로 말뚝을 박고, 예편 후 교련 선생이 되고, 평생 조선일보를 구독한 인물이 사회주의자 아버지에게 말했다. 먹은 소주를 죄다 눈물로 흘리며.


"상욱아, 너 하염없다는 말이 먼 말인 중 아냐?"


하염없다.

사전에는 어떤 행동이나 심리 상태 따위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는 상태 혹은 멍하니 아무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그러니까 하염없다는 말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지는 것이 생이었던 이들이, 그래서 차라리 아무 생각 없는 것이 나았을 시간들을 지나왔다는 말이다. 혹은 어쩌지를 못했던 시간을 지나왔는데 이후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이데올로기와 신념에 대해 생각했다. 언뜻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도 같지만 전혀 다르게 여겨졌다. 이데올로기는 옥죄는 덫이지만 신념은 자발적 유폐이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한솥밥을 먹은 사람들을 밀고하고 죽이지만, 신념에는 내가 죽을 줄 알면서도 적을 놓아주는 '마음'이 놓여있다. 신념. 이 순수한 정신세계는 계산하지 않는다. 지는 싸움인 줄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념을 지닌 이들은 성스럽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종교, 혁명. 이렇게 거대한 이상 뒤에는 한없이 나약하고도 강한 '사람'이 있다는 걸 정지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거다. 그 많은 에피소드 속 아버지의 이 한마디로.

"긍게 사램이제"


무엇보다 소설 말미, 아버지 화장터에서 어머니의 회한은 너무 낯설고 우스웠다. 그래서 슬펐다. 이것이 '정지아스러움'인가 싶었다.

"아이 쫌 대줄 것을 그랬어야." (중략)

"아무리 그래도 화장하는데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자기가 생각해도 우스운지 어머니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식 웃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긍게이. 이상허지야. 여개 앉아 있응게 자꼬 그날 생각이 나야. 쫌 대줄 것을... 나 아픈 중 빤히 아는 사램이 자개도 오죽허먼 그랬을랑가 싶고야..."

(책을 읽은 분들은 무슨 말인가 아실 것이다)



사람은 무엇일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근원적이고 하염없는 질문을 절대 무겁지 않게 오히려 새털처럼 가볍게 다루고자 했던 작가의 고심에 찬사를 보낸다. 이 책의 탄생은 고맙고도 마땅하다.


신념도 없이 진영 타령만, 남 탓만 하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람'은 없고 입만 나불대는 껍데기들만이 바람에 흩어져 날린다. 춥다.



작가의 이전글 겨울 우체국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