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디슈 뺨치는 아프리카 가나 탈출기 #02

한 치 앞도 모르는 우리의 인생

by 참깨

즐겁고도 아쉬운 송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던 중, 전기가 끊겼다. (전기 수급이 잘 되지 않는 가나의 사정상 으레 있는 일이겠거니 하며 지나갔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때의 단전은 서아프리카 앞바다에 매장된 광케이블인지 뭔지의 문제였단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들끓는 모기를 잡아줄 홈매트도 켤 수가 없어 도통 잠을 청할 수가 없었고, 눈물이 날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그때 나는 학교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게 된다.




갑작스러운 실습 중단 메일로 인해 충격을 받았지만 나는 아주 침착해야 했다. 먼저 이미 한 학기의 약 1/3이 지나간 상태에서 학사 복귀를 하는 것이 과연 나에게 이로운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휴학의 경우에도 이미 3년이라는 학교의 최대 휴학 기간을 전부 써버렸는데 그런 경우에도 휴학이 가능한 것인지, 그다음 학기에 싱가포르로 교환학기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직전학기에는 휴학이 불가능한 규정이 이 경우에도 적용될지 등 생각할 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주 차분하게 답장을 드렸지만 이런 이유로 밤에는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내가 남긴 인스타그램 스토리 하나. 불과 5시간 전, 너희는 조기귀국 안 하냐는 말에 우리 기관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호언장담한 내게 떨어진 시련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우리의 인생을 보여주는 그것이었다.





출근 후 이 이야기를 상사에게 보고하면서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6월까지 있어야 하는 인턴십이 반토막이 나버렸으니 앞으로 나는 어떡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지만 본사 지침이라면 손 쓸 방법이 없다는 게 대화의 결론이었다. 일단 본사에서 더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했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 파견을 나갔던 인원은 나까지 총 6명이었고, 그중 4명은 중국으로 파견되었었기 때문에 "코로나19"가 "우한폐렴"이던 시절 이미 파견을 종료하고 한국에 들어온 상태였다. 따라서 남은 우리 2명은 힘이 없었다. 그러나 □□대학교 학생들은 달랐다. 그들은 60명이라는 인원이 파견된 상황이었다. 그들의 부모님들은 학교에 항의 전화를 걸었고, 학생들은 공동성명문을 냈다. 나는 공동성명문에 이름을 올리기만 했을 뿐인데(솔직히 이름을 올렸었나도 가물가물하다.) □□대학교 학생들의 단결력 덕분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본사 측에서 후속조치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되 인턴십은 재택근무 형식으로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 하여 나는 씁쓸하지만 최악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사태 발생 약 열흘 후인 3월 28일 출발 비행기를 예매하게 되었다.



이대로였다면 나는 가나를 탈출하지 않았어도 됐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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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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