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필자의 여행기가 시작됩니다) 약 3개월에 걸친 준비 끝에 드디어 미국 서부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휴가 일정이 뒤늦게 확정되는 바람에 허겁지겁 항공권을 알아보니 저렴한 항공권은 발 빠른 누군가에 의해 이미 예약이 끝났고, LA 직항은 200만 원 정도로 가격이 많이 올라있었다. 나름 제일 나은 선택으로 타이완을 거쳐 LA로 향하는 차이나 에어라인을 150만 원 정도에 예약하였다. 타이완에 3시간 정도 stop over를 하는 조건이었지만, 1인당 50만 원을 절약했다는 생각에 나름 뿌듯했다. 드디어 태평양을 건너 미국 LA로 날아간다. 총 16시간 정도의 긴 여행이지만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라 마음이 설렌다.
아내와 아이들은 처음 밟아보는 미국 땅. 입국심사를 할 때 혹시라도 뭔가가 잘못되어 입국을 거부당하는 일이 있을까 봐 걱정을 했었는데 무사히 잘 빠져나왔다. 사실 아빠가 가장 많이 긴장했지만 지금 사진을 보니 둘째 녀석도 긴장을 했던 모양이다. (ㅎㅎ)
공항에서 나와 바로 렌터카를 빌리러 갔다. 트래블 직소(현재는 Rentalcars.com, 현지 렌터카 업체를 연결만 해주는 사이트)를 통해 예약했는데 Dollar라는 렌터카 업체가 배정되었다. 그 당시 렌터카를 빌릴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제법 있었는데, 특히 현지 업체에서 추가 보험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경고가 많았다. 마음속으로 추가 보험 절대 안 들어야지 하며 렌터카 업체를 찾아갔는데 직원을 만나자마자 많이 위축되었다. 키는 나보다 훨씬 컸고,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를 정도로 혀를 빠르게 굴려대는 흑형이 나를 상대하였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계속 보험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이미 필요한 보험은 다 들어놓아서 추가 보험은 필요 없다고 거부를 여러 번 했지만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미국에서 운전하면 꼭 필요한 보험이고 안 들면 큰일이 날것처럼 계속 설명을 해대는 것이다. “No need additional insurance!”를 정색하고 힘주어 얘기했더니 포기했는지 그럼 계약서 항목에 체크하고 사인해야 차를 준다 한다. 그런데 계약서에 체크할 항목이 너무 많았다. 처음에는 신경 써서 읽으며 체크했는데 해석도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급기야 직원에게 이거 Yes로 하면 되는 거냐 하는 식으로 물어보며 Yes/no 항목을 채워 넣고 마지막으로 사인하고 나서야 차를 인도받을 수 있었다.
미리 차량을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어떤 차가 배정될지 궁금했었는데 주차장에 가보니 빨간색 밴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 차였고 생각보다 실내가 아주 넓은 3열 시트 구조여서 첫째는 두 번째 열에 눕고, 막내는 마지막 열에 누워서 자기 자리를 찜하는 등 분위기가 좋았다.
렌트 차량에 대한 최종 영수증은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 받았는데 혹시나 하고 확인을 해보니 글쎄 아까 절대로 안 든다는 추가 보험이 찍혀있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직원의 말을 믿고 yes를 했던 항목에 그 추가 보험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가서 따지려고 생각했었지만 이미 사인해버린 이후에는 계약을 되돌릴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고, 또다시 그 흑형과 실랑이를 벌인다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어서 쓰린 속을 붙들고 그냥 목적지로 향하기로 했다.
그랜드캐니언은 LA공항에서 9시간 정도 운전해야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서 중간지점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 출발하는 일정으로 잡았다. 중간지점 숙소는 그냥 잠만 잘 숙소라 위치가 좋고 가격이 저렴한 곳으로 정했는데 또 다른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 11시 30분에 숙소에 도착하니 주차장 마당이 공사 중인 듯 파헤쳐져 있었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공사 때문에 물이 안 나오는데 밤 12시경에는 물이 나올 예정이니 걱정하지 말고 짐을 풀라는 것이었다.
슬쩍 의심이 들었지만 설마 거짓말을 하진 않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이 생겨서 예약한 방에 짐을 풀었다. 거의 이틀 동안 잠을 못 잔 상태라 몸은 녹초가 되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물은 나오지 않았다. 카운터를 찾아가기를 몇 번. 한참을 더 기다리다가 아이들은 먹는 생수로 간단하게 양치하고 얼굴, 발만 닦고 취침을 시켰으나, 화장실 물도 안 나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카운터에 가서 주인에게 따졌더니 이 사람이 글쎄,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음날 오후까지 푹 쉬란다. 나도 생수로 양치하고 겨우 얼굴, 발만 닦고 2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게 었다. 잠깐 잠이 들었나... 어디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벌떡 일어나 수도꼭지를 틀어봤는데 물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오 마이 갓, 또 속았다.
다음 날 아침, 파란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기다리던 물이 드디어 나온다. 아이들과 아내 먼저 샤워하게 했고, 나는 아침을 먹고 맨 마지막에 씻을 계획이었다. 아침을 챙겨 먹고 씻으려고 하니, 물이 다시 안 나온다! (문제의 로드 웨이인! 그래도 이것도 추억인가? 그랜드캐니언은 잊혀도 로드 웨이인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더 컴플레인할 기력도 없고 능글능글한 인도 주인장 녀석을 도저히 말로 해볼 수 없었다. 참자!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두 가지 사건을 겪었던 우리 가족은 드디어 그랜드캐니언으로 향한다. 황량한 사막을 가로지르는 아스팔트 길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숙소에서 6시간 정도 달려야 그랜드캐니언에 도착하는 긴 여정인데, 전날 숙면을 하지 못해서 그랬는지 점심 먹고 운전을 하는데 졸음이 무지 밀려왔다. 아내도 피곤하다고 뒷좌석으로 넘어가서 자고, 딸아이가 조수석에 앉아서 내 옆을 지킨다. 그런데 정말 너무너무 피곤했다. 휴가 오기 전에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집에 오면 12시였지, 비행기에서도 자리가 불편해서 잠을 못 잤지, 로드 웨이인에서 새벽 2시 넘어서 잤는데 물 나올까 봐 중간중간에 깼지, 시차 적응도 안 되지, 게다가 주변에 풍경도 비슷비슷한 정말 단조로운 길이 이어진다. 하품만 열 번도 더하고 눈물이 날 정도로 허벅지 꼬집기를 여러 번 했는데 나도 모르게 꾸벅 졸고 말았다.
크루즈 기능을 써서 시속 100km로 고정해 달리고 있는 상태에서 졸음운전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천우신조로 어디선가 나는 날카로운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옆에 있던 딸아이는 아빠가 졸음운전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잠에서 퍼뜩 깨어보니 잠깐 사이에 우리 차는 차선을 넘어 갓길로 거의 나가기 직전이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인데 도로 가장자리에 실선과 함께 자잘한 홈을 파놓아 바퀴가 닿으면 타이어와 마찰음이 나도록 한 장치가 우리 가족을 살렸던 것이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드디어 그랜드캐니언 입구 윌리엄스에 도착했다. 숙소인 로드 웨이인(바스토우 지역)에서 513km, 5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곳인데 그랜드캐니언 안에 숙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윌리엄스 지역이나 바로 옆 플래그스태프(Flagstaff) 지역에 숙소를 잡는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했다. 그랜드캐니언까지는 86km, 1시간 정도를 더 달려야 한다.
저 멀리 독수리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옛날 인디언들은 저 산을 보고 위치를 잡으며 그랜드캐니언으로 향했다 한다.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독수리산까지 닿을 듯 일직선으로 쭉 뻗었다.
드디어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미국은 국립공원에 입장할 때마다 차 한 대당 요금을 낸다. 우리처럼 여러 공원을 다니는 일정이면 애뉴얼 패스(Annual pass)를 사는 게 이득이다. 1장에 80달러인데 1년 동안 내내 쓸 수 있는 카드이다. 여름휴가철이라 그런지 차들이 많다.
숙소는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 내의 Yavapai Lodge를 예약했다. 그랜드캐니언에서 일몰과 일출을 보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숙소는 반드시 뷰포인트에게 가까워야 했다. 밖에서 보기에는 좀 허름하지만 내부 시설은 호텔처럼 깔끔하고 괜찮았는데 특히 침대가 푹신하고 이불도 부드러워 참 좋았다.
침대 사이즈도 넉넉해서 초등생 꼬맹이들과 함께 자는 데 전혀 문제없었다.
짐을 대충 풀어놓고 일몰을 보러 나간다. 구글 지도에서 보듯, 그랜드캐니언에는 여러 개 뷰포인트가 있는데 필자가 선택한 숙소인 Yavapai Lodge에서 Yavapai 뷰포인트까지는 차로 3분(1.4km)인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랜드캐니언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의 거리가 이 정도일까?
기대하고 기대했던 그랜드캐니언. 아이들과 아내는 감탄의 연속이다. 좋다!
둘째 녀석, 협곡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랜드캐니언 협곡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어본다. 그 당시 아이들이 한창 재미있게 읽었던 ‘까막 나라 불개’ 놀이도 해본다.
그랜드 캐니언 협곡 너머로 해가 진다.
멋진 저녁노을을 선사한 태양이 지고 협곡은 이내 어둠 속에 잠겨간다. 너무 피곤했다. 그랜드캐니언 위로 떠 있는 별과 달을 보고 싶었지만 이틀 동안 잠을 거의 못 자 여독이 쌓여선지 숙소에 돌아와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후 식구들 모두 쓰러지듯이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아빠의 중요한 임무는 하나 더 남았다. 아침에 일어나는 알람을 맞추는 것!
그랜드캐니언 일출을 놓칠 수 없어서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식구들을 깨우고 아이들 옷을 입히고 다시 Yavapai 뷰포인트로 향한다. 서둘러 갔는데도 벌써 많은 사람이 모였다. 다행히 아직 해는 뜨지 않은 상태. 구름이 많이 깔려 걱정도 좀 되었지만 기대가 더 크다.
동쪽 하늘이 더욱 붉어지고
황금빛 광선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한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그랜드캐니언의 일몰과 일출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숙소를 공원 안에 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 주차장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사슴을 우연히 만났다. 아니 공원 안에 사슴이 자유롭게 놀다니. 사슴이 도망가기 전 잽싸게 사진을 찍느라 아들의 얼굴도 좀 어색하게 나왔다.
숙소에서 아침을 해 먹고 다음 목적지를 가기 위해 다시 서둘러 나왔다. 아침에는 구름이 많았지만 어디로 가버렸는지 하늘은 정말 맑고 푸르기만 하다.
그냥 떠나기 아쉬워 벼락 맞아 타버린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더 찍어본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저 협곡 아래로 내려가 보는 당나귀 투어나,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헬기 투어 또는 몇 시간 동안 걸어 다니는 트래킹을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우리 가족은 이제 인디언의 성지, 모뉴먼트 벨리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