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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앵 Jul 09. 2020

여름 무


 

아빠가 회사를 그만 둘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냥 가볍게 아닐거라고 여기며 넘겼고 또 그러길 바랬다. 그리고 그 말이 씨가 되어 꽃을 피웠을 즈음엔 나는 스물 두 살이 되어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의 이 평화로운 생활을 뒷받침해줄 수입원을 적어도 대학졸업까지는 유지해줬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아빠의 사회생활이 있는 듯 했고 대충 예상하기로는 거기에 진절머리가 났으며 육십넘어서까지 일하기는 싫다는 당신의 굳은 의지를 엄마와 나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티비에서 보면 정년 퇴직을 한 60대는 마음 한 구석이 허해진 채 일상을 보내던데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죄다 허상이고 거짓말이다. 아빠는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을 실현이라도 할 것처럼 3년째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있다. 등산을 매일 가는 규칙적인 생활을 할때도 있었고 빈둥거리며 아무것도 안하는 집돌이로도 꽤 오래 있었으며 바둑을 하루종일 두고 골프채널 바둑채널을 번갈아 보기를 반나절이다가 최근 일년정도는 친구네 농장을 빌려 텃밭을 가꾸고 있다.  

  

엄마는 거기 왔다갔다하는 기름값으로 작물을 사겠다고 처음엔 못마땅해했지만 제법 가져오는 물건들이 좋다보니 언제부턴가는 오늘 뭐 가져온거없냐부터 시작해서 김치 담글 재료들을 돈들여 사지 않고 의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작년 겨울엔 아빠가 키운 배추로 절여지지않는 빨간김치를 만들어 먹었고 올해 여름은 담글때마다 레시피가 다르지만 맛있는 열무김치를 담갔다. 본인의 철저한 계산으로 이루어진 담그는 시기와 여름을 나기 위해 적당히 익어 맛있어지기까지의 시간까지. 우리의 여름은 그녀의 계획하에 준비되어지고 시작된다. 그러므로 아삭한 열무가 들어간 엄마표 비빔국수가 생각나기 시작했다는 건 바로 우리 집에 여름이 왔다는 증거. 매년 담그는건데도 올해는 아빠가 가져온 열무로 만들어서 그런지 더 맛이 좋다.    


여름은 매년 돌아온다. 계절이 돌아온다는 건 사람도 나이를 먹는다는 건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빠의 나이를 세고 있지 않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의 아빠는 젊은 시절 그 못되게 생긴 얼굴도 아니고 결혼하고 나서 눈꼬리가 내려온 모습도 아니며 인생의 맛을 조금 더 알게 된 얼굴이랄까. 숫자를 까먹게 되는 얼굴이다. 난 그 얼굴이 참 좋다. 그러니 오래오래 보고 싶다. 우리 집에선 아빠의 전생을 돌쇠로 점치곤 하는데 이 돌쇠가 건강하게 오래 열무를 가져와 여름의 막을 올려주면 좋겠다. 돌쇠 딸은 받아먹기만 하겠지만. 그런 미래가 이미 와있는 중이길 바라며 아빠의 열무를 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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