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높지 않은 조회대 위에서 나는 열심히 눈을 굴렸다. B군의 정면을 볼 자신은 없으니까 항상 팽이 치는 정수리를 가진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는데 동체시력이 이렇게 좋았나 싶게 그 특이한 뒤통수를 바로 찾아냈다. 등에는 이름이 영어로 적혀있었다. Torres.
뭔진몰라도 축구선수 이름이겠거니 했다. 다른 애들도 저마다 하나씩 흠모하는 축구선수를 등에 지고 뛰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토레스만 쫓았으므로 메시나 호날두가 있었어도 거기에 있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너는 토레스구나.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운 좋게 내 눈이 B군을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기회가 찾아왔다. 다음날 학교에서 B군과 그의 친구가 내게 어제 축구경기를 보러 왔었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직감적으로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 토레스였잖아. 물은 것은 B군의 친구였는데 친구 등짝에는 맹구가 있었는지 영구가 있었는지 안중에도 없는, 내가 보내는 최초의 신호였다.
내 입장에서는 완전 너에게 관심 만땅이다 도장 꽝 찍어주는 거였는데 B군은 눈치를 챘었는지 어쨌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한낱 얼굴도 모르는 토레스로 인해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생각보다 마음 표현하는 데에 있어 서스름 없는 편이라는 것을. 조심스럽고 신중하면서도 어느 타이밍에는 막힘없이 내 비출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부끄러워서 숨길대로 숨기지만 마음이 넘쳐서 넘친 마음을 은근하게 그에게로 흘려보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 작고도 작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16살 때 좋아했던 사람이 평생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나는 청개구리라 그 말에 동의하고 싶지도 않고 근거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미친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아련한 추억이래봤자 B군말고는 없어서. 없어서 그렇게 끌어안나보다..하고 내 자신을 짠하게 바라보는 인생. 그러니 너무 늦지 않게 B군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말아야지. 어느 DJ가 내게 해줬던 말처럼 찾아오길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찾아 나서든가. 현실은 그 모든게 귀찮은 내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고 여전히 내가 아는 축구 선수 이름은 메시와 호날두를 제외하고 토레스뿐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