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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ndmer Jun 22. 2024

반도체 삼국지

글로벌 반도체 산업 재편과 한국의 활로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산업의 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반도체의 생산기지는 주로 대만, 한국,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에 몰려 있다. 


특히 대만과 한국은 글로벌 프로세서 칩 생산의 83퍼센트, 메모리 칩 생산의 70퍼센트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여기에 급부상하는 중국과 전통의 강자인 일본까지 포함한다면, 가히 동아시아가 21세기의 페르시아 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만약 제1차 오일 쇼크 때처럼 대만과 한국에서 공급되는 반도체 생산량의 5퍼센트가 줄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도 공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 혼란이 가중되어 DRAM이나 MCU 같은 반도체 제품들의 가격이 급등할 것이다. 


이는 반도체 산업 자체는 물론, 반도체에 의존하는 IT 산업과 자동차 등 여타 다른 산업의 성장률을 마이너스로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반도체 파운드리 기술을 선도하고 있는 대만과 한국은 모두 첨단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조와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어 지리적으로는 물론 산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국 견제의 최전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대만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국이 대만을 함부로 무력 침공하지 못하게 하는 주요 방어 수단이 되고 있을 정도다. 


이렇듯 대반과 한국이 미국 주도의 글로벌 가치사슬의 중요한 노드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역시 완전히 독자 생존의 길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지 않는 이상 대만과 한국에 대한 의존에서 함부로 벗어나기 어렵다. 


중국에게는 이러한 미국 주도의 반도체 산업 글로벌 가치사슬이 목구멍의 가시 갚은 존재다. 


여전히 16퍼센트 내외인 자국산 반도체 자급률을 고려하면 이는 매년 거대한 규모의 무역 적자가 발생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20년에 중국은 총 35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를 수입했으며, 이는 같은 해 에너지 수입 규모의 두 배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러한 적자는 G2로 확실히 자리매김하려는 중국에게는 골칫덩이다. 


현재 세계는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로 나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이 때문에 반도체 공정 라인이 없던 국가는 외국의 반도체 생산 라인을 도입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 직접 제조에 뛰어드는 나라도 있다. 


앞으로 이 현상은 점점 더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이 현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한 번 알아볼 수 있도록 하자. 


Ⅰ. 일소현명 


에도 시대 이래 일본 사회에는 이른바 일소현명이라는 철학이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말 그대로 한 장소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이다. 예전에는 이 철학이 좁은 의미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받아 온 영지를 목숨 걸고 사수한다는 뜻으로 쓰였지만, 오늘날에는 한 직업, 한 회사, 한 조직, 한 분야에 골몰하여 집중한다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영지를 사수해야 하므로 영주든 사무라이든 농민이든 평생 경계를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 


사회는 정주형 사회가 되며, 아버지의 직업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이 미덕인 문화가 자리 잡았다. 


정주형 사회의 철학은 학문 영역, 특히 기초과학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기초과학 연구는 하루아침에 결실을 맺기 어려우며, 꾸준한 연구와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몇 년 사이에 눈에 띄는 결과를 내지 못해도 꾸준한 연구를 사회적으로 장려하고 지원하며 그러한 연구자를 존경하는 풍토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일소현명 철학이 힘을 발휘했고, 메이지 유신 이래 과학에 투자한 시간이 충분히 누적되며 기초과학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일소현정 정신은 개인 연구자만이 아니라 스승에서 제자로 대를 잇는 연구로까지 이어진다. 


Ⅱ. 일본 반도체 산업의 중흥과 시련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일본 정부의 치밀한 계획이 밑받침되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1970년대 오일 파동을 겪으며 일본 정부는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을 위한 핵심 과제로 첨단 산업 육성을 선정하고 통산산업성 주도로 초 LSI 기술연합이라는 일종의 민관 연합기수를 만들었다. 


일본 특유의 관 주도 방식으로 탄생한 이 단체는 개별 기업 차원에서는 미국의 앞선 기업들을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 간 연구개발 비용의 중복 투자를 방지하고 기술 노하우를 공유하며 시장 변동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는 토대로 작동하였다. 


특히 이 단체는 일본의 독자적인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창출하는 것도 목표로 잡았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반도체 업체들은 물론이고 실리콘 웨이퍼 같은 반도체 소재, 에칭이나 증착 등의 공정 장비, 기타 부품 관련 중소기업들이 많이 육성되었다. 


결과적으로 강고한 반도체 산업 생태계는 일종의 수직화된 반도체 산업 구조를 형성했고, 이는 일본 반도체 산업의 효율성을 보장하는 시스템이 되었다. 


1980년대부터는 DRAM이 대용량 컴퓨터와 통신 장비에 필수적인 부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DRAM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러한 시장 상황을 예견하고 선도적인 투자를 했던 일본 업체들은 우수한 공정 수율과 상대적으로 저렴한 단가에 엔저 호황까지 겹쳐 그전까지 미국이 사실상 독점하던 반도체 시장을 평정할 수 있었다. 


NEC는 1985년 1991년까지 반도체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였고, 같은 기간 매출액 기준 반도체 상위 10개 사 중 6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이렇게 몇 년 사이에 일본이 약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치킨게임에서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선행기술과 반도체 산업 클러스터에 엄청난 연구개발 투자를 하여 생산 수율과 품질에서 압도적으로 앞선 기술력을 확보한 일본 기업들은 마침 엔저 호황으로 막대한 자금력까지 보유하게 되자 미국의 강자를 상대로 치킨게임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치킨게임에서 승리하게 된 일본은 무려 80퍼센트 가까이 글로벌 시장을 점유하며 승자 독식의 포지션을 취할 수 있었다. 


Ⅲ. 치킨게임의 과정


선행주자는 선행기술 투자로 확보된 노하우를 이용하여 후발주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품질의 반도체 칩을 만든다. 


후발주자가 시장에 진입하는 시기에 선행주자는 이미 현재 기술 기반의 반도체 칩에서 다음 세대 기술 투자를 위한 충분한 자금을 회수한 상태이다. 


후발주자가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단가를 낮추면, 선행주자는 이미 확보된 넉넉한 자금을 바탕으로 단가를 압도적으로 더 낮춰버린다. 


후발주자의 자금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원가보다 한참 낮은 단가를 오래 버티기가 힘들고, 이 과정에서 자금 회수가 안 되는 대부분의 후발주자들은 떨어져 나간다. 


시장은 다시 소수의 선행주자들이 과점 상태가 되며, 반도체칩의 가격은 이들의 기술개발 사이클에 맞춰 원상 복구된다. 


그리고 후발주자가 다시 그다음 세대의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지만, 과정은 1단계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후발주자가 치킨게임의 승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전자이다. 삼성전자의 경영진은 업계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바로 다음 세대의 선행기술 개발에 더 막대한 투자를 하는 역공법을 취함으로써 역시장에 대응하였다. 


즉, 이전 세대 기술을 채택한 제품에서 회수한 자금을 선순환시켜 다음 세대 기술 기반의 제품 라인을 만드는 종래의 방식이 아닌 이전 세대 제품은 그냥 치킨게임의 희생물로 바치고 신규 투자로 바로 다음 세대 라인을 건설하는 전략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삼성의 이러한 전략은 1987년 들어 반도체 사이클이 다시 호황으로 접어들고 1Mb DRAM이 주력이 되자 코너에 몰려 있던 삼성을 기사회생시킨 말 그대로 신의 한 수였다. 


Ⅳ. TSMC와 삼성의 파운드리 전쟁


TSMC와 삼성의 기술 전쟁은 향후 7 나노, 5 나노, 3 나노, 그리고 2 나노 이하급으로 계속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럴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초미세 공정 기반의 반도체칩으로 갈수록 원가가 상승되는 폭이 매우 커져서 시장에서의 가격도 예상보다 더 높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DUV 등의 범용 노광 기술 기반 반도체칩에 비해 EUV 노광이 활용되는 5 나노 공정 이하 기술에 기반한 반도체칩은 생산단가가 10배 이상으로 형성된다. 


무어의 법칙에 따르면 공정이 진보할수록 칩 가격은 이하 되어야 하지만, 공정 원가가 높게 형성되다 보니 칩 가격도 인상된다. 


5 나노 공정까지 TSMC에게 양산에서 밀리고 있던 삼성전자가 기술 전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그것은 3 나노 이하 공정에서부터 일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3 나노 이하급 공정에서 본격적으로 FinFET이후의 트랜지스터인 GAAFET을 도입하려 했고, 실제로 2022년 7월 세계 최초로 GAAFET 기반 칩의 제조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TSMC가 3 나노 공정에서 여전히 FinFET을 활용하려는 부분과 차별화된다. 


2019년에 공개한 나노시트 형태의 채널을 채용한 GAAFET 기술은 7 나노 공정 FinFET 대비, 물리적 공간을 45퍼센트 이상 절감하고, 소비전력 역시 50퍼센트를 절감하며 성능은 35퍼센트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 


2 나노 이하급 차세대 공정에서는 GAAFET 외에도 MBCFET이나 CFET의 신기술이 채용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는 인공지능, 자율주행, IoT 분야로 확대될 고객 생태계에 선제 대응할 수 있는 기술이 될 것이다. 


다만 FinFET 기반 공정과는 최적화 요소가 다르기 때문에 양산 공정 수율 안정화가 어렵고, 이것이 양산 로드맵의 연기를 낳는 원인이 된다. 


3 나노 혹은 그 이하 공정에서 어떤 회사가 먼저 안정된 수율로 양산을 시작하는지가 결국 2020년대 중반 이후의 파운드리 시장 판도를 결정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TSMC의 3 나노 공정에서는 이전 5 나노 공정 대비, 30퍼센트 이상의 소비 전략 절감, 10~15퍼센트 이상의 성능 향상이 예상되는데, 트랜지스터의 아키텍처 자체는 계속 FinFET 구조를 사용하므로, 결국 이 공정의 양산 가능성은 이전에 비해 30퍼센트 이상 줄어든 선폭을 갖는 FinFET 특히 Fin 형태의 매우 얇은 채널을 얼마나 정밀하게 제조하는지에 달려 있다. 


이 역시 EUV 노광 공정이 점차 안정화됨에 따라 양산 가능성이 충분히 올라갈 것으로 전망되나, 역시 그에 비례하여 공정 비용과 선행 R&D 비용이 동반하여 급상승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 글을 마치며 ]


A라는 국가 혼자만 미래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 기술은 모든 것을 자동화시키고 디지털화시켜서 인류의 발전을 급격하게 가져다주는 마법의 반지와도 같은 기술이라고 상상해 보자. 


그런 기술을 가지게 된다면 A라는 국가는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 기술을 기반으로 다른 국가들과 엄청난 격차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그 기술은 인공지능이라고 보이고 그 기술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도구가 반도체 칩이라고 보인다. 


덕분에 인공지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엔비디아의 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공행진을 하고 있고 엔비디아도 시가 총액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이 되었다. 


지금의 현상이 거품에 가깝다 혹은 예전 IT 버블과도 유사하다는 말들이 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조금은 다른 현상이라고 보인다.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가 사용하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실질적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 기술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화된 데이터, 인공지능을 최적화시키는 알고리즘, 그리고 위의 두 가지를 처리할 수 있는 반도체 칩이 필요하다. 


이 중에서 현재는 반도체 칩만 있으면 빅테크 기업들은 알고리즘을 만들거나 데이터를 모아서 인공지능을 발전시킬 수 있다.


결국 가장 우수한 반도체 칩을 누가 가지게 되느냐에 대한 질문이 남게 되는데 이는 다시 두 단계로 나뉘게 된다. 


반도체 칩의 설계와 제조가 바로 그것이다. 


현재 반도체 칩을 설계하는 팹리스 회사들은 많지만 초미세 공정으로 그것을 구현하고 제조해 줄 수 있는 기업은 TSMC 하나뿐이다. 


덕분에 TSMC는 대만을 넘어 일본, 미국, 유럽에도 공장을 짓고 전 세계 곳곳에서 공급하는 형태로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 현상을 그대로 두고 볼 미국과 중국이 아니다. 자신들의 기술력으로 반도체 굴기를 이뤄내겠다는 시도를 하고 있고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일본도 새로이 시장에 진입하고자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 4년 후에는 스스로 반도체 제조를 하겠다는 비전도 가지고 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석유라는 자원이었고 이후에는 총이라는 도구가 패권을 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이후에는 폭탄이 되었고 현재는 인터넷과 정보통신 기술, 반도체로 이동하고 있는 것뿐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아직 누가 압도적인 격차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술은 점점 가시화되어가고 있고 실적도 뒷받침되고 있고 더 많은 자본이 투입되고 있다. 


지금까지 주요국들의 빅테크 기업들의 로드맵을 고려해 본다면 2025년 하반기에는 변화의 visibility가 높아질 것이고 승자가 조금씩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나갈 수 있도록 하자. 


참고 도서 : 반도체 삼국지 ( 권석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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