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소부장) 경쟁력은 2026년 현재에도 대체 불가능한 글로벌 초격차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 80년대 반도체 제조 패권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반이 되는 원천 기술과 정밀 제조 분야에서는 여전히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병목을 쥐고 있는 형국이다.
구체적인 분야별 경쟁력과 현황은 다음과 같다.
1. 소재 (Material) : 독점에 가까운 지배력
반도체 미세 공정이 고도화될수록 일본 소재에 대한 의존도는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특히 7nm 이하 초미세 공정에 필수적인 EUV(극자외선) 관련 소재에서 압도적이다.
포토레지스트 (PR) - EUV용 포토레지스트 시장에서 JSR, 신에츠 화학, 도쿄오카공업 (TOK) 등 일본 3사의 점유율은 약 90%에 달한다.
고순도 불화수소 : 솔브레인 등 한국 기업의 국산화 성과가 있었으나, 최고 순도 및 초정밀 공정용 액체/기체 불화수소에서는 여전히 일본 기업(스텔라 케미파, 모리타 화학 등)의 기술적 우위가 뚜렷하다.
블랭크 마스크 : 첨단 노광 공정에 쓰이는 블랭크 마스크 시장도 호야 (HOYA) 등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2. 장비 (Equipment) : 7대 핵심 공정의 강자
세계 5대 반도체 장비사 중 2개(도쿄일렉트론, 스크린 홀딩스)가 일본 기업이다.
도쿄일렉트론(TEL) : 코터/디벨로퍼 (감광액 도포 및 현상 장비) 분야에서 세계 점유율 약 90%를 차지하며, 식각 및 증착 장비에서도 글로벌 Top3 수준이다.
캐논 (Canon) & 니콘 (Nikon) : ASML이 독점한 EUV 노광기 외에 레거시 공정 및 나노 임프린트 등 차세대 저비용 노광기술에서 반격을 꾀하고 있다.
검사 및 계측 : 어드반테스트는 메모리 테스터 시장에서 세계 1위를 다투며, 레이저 텍은 EUV 마스크 검사 장비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공급한다.
3. 신기술 트렌드 : HBM과 2 나노 공정의 핵심 파트너
AI 반도체 열풍으로 인한 HBM4 (6세대 고대역폭 메모리) 양산과 2 나노 공정 경쟁에서도 일본 소부장의 영향력은 막대하다.
어드밴스드 패키징 : 엔비디아 GPU와 HBM을 결합하는 CoWoS 패키징 공정에 필수적인 FC-BGA 기판 및 언더필 소재에서 레조낙, 나믹스 등이 독보적인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
라피더스(Rapidus) 프로젝트 : 일본 정부는 자국 내 2 나노 로직 반도체 양산을 위해 라피더스를 지원하며, 이를 중심으로 일본 소부장 기업들의 결집력을 다시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장비 없이는 반도체를 만들 수 없고 일본의 소재 없이는 반도체 회로를 그릴 수 없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력한 기초 체력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도쿄 일렉트론은 특정 공정에 치우치지 않고 반도체 제조의 4대 핵심 공정 (노광, 식각, 증착, 세정) 장비를 모두 생산하는 전 세계 유일의 토털 솔루션을 보유하고 있다.
덕분에 TEL의 매출은 AI 반도체 및 첨단 로직 공정에 대한 투자 확대에 힘입어 강력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TEL의 핵심 경쟁력은 대부분의 제품군에서 독점 또는 과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감광액 도포 및 현상을 위한 코터 및 디벨로퍼는 글로벌 점유율이 90%가 넘는다.
회로 패턴을 형성하는 식각 장비에서도 약 25~30% 수준으로 세계 2~3위 수준이다.
박막을 형성하는 장착 장비 역시 30~40% 수준으로 세계 1위이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세정 장비 (Cleaning)에서도 스크린 홀딩스와 함께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일본이 현재와 같은 소부장 강국이 된 배경에는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 (모노즈쿠리)이 반도체 산업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 흐름은 크게 세 가지 결정적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70~80년대 : VLSI 컨소시엄과 수직 계열화의 승리이다.
일본 반도체 신화의 시작은 정부 주도의 VLSI 기술연구조합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히타치, NEC, 후지츠, 도시바, 미쓰비시 등 민간 기업들을 한데 모았다.
기업들이 제조 공정과 장비 기술을 공유하며 기초 체력을 쌓았다.
이때 쌓은 초정밀 가공 기술이 현재 소부장 기업들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 일본 전자 기업들은 반도체 칩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는 장비와 소재도 직접 만들거나 계열사를 통해 조달했다.
이 과정에서 제조 현장의 피드백이 즉각 소재 장비 개선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확립되었다.
1990~2000년대 : 전략적 후퇴와 니치마켓 선점
90년대 들어 한국의 거센 추격과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은 완성품 시장에서 주도권을 잃기 시작한다.
이때 일본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핵심 영역으로 파고드는 전략적 선택을 한다.
범용 제품 대신 원천 기술을 확립하는데 집중한 것이다. 수익성이 낮아진 메모리 칩 생산은 포기하되, 그 칩을 만드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원천 소재(화학)와 정밀 부품에 집중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과거 고도 성장기를 이끌었던 일본의 거대 화학 철강 기업들이 반도체용 고순도 가스, 감광액, 실리콘 웨이퍼 등 고부가가치 정밀 화학 분야로 체질을 개선하며 독보적인 기술 장벽을 쌓았다.
마지막으로 일본 특유의 기업문화인 모노즈쿠리와 오타쿠적 집요합이 결집되었다.
반도체 소부장은 단기간에 돈을 쏟아붓는다고 결과가 나오지 않는 분야이다.
일본 특유의 문화적 특성이 여기서 빛을 발했다.
일본 기업들은 당장 이익이 나지 않아도 수십 년간 한 우물만 파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EUV 포토레지스트 같은 경우 시장이 열리기 20년 전부터 연구를 지속해 온 결과 지금의 독점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장비와 소재는 제조 현장에서 미세한 수치를 조정하며 최적값을 찾아내는 암묵지(개인의 경험과 학습을 통해 몸에 체화된 지식)가 중요하다.
일본 엔지니어들의 꼼꼼함과 숙련도가 디지털화하기 어려운 이 영역에서 강력한 진입장벽을 만들었다.
반도체 칩(완성품) 시장에서는 한국과 대만에 밀려 퇴장했지만, 그들이 반도체를 만들 때 반드시 써야만 하는 장비와 소재 시장으로 숨어들어 지배자가 된 것이 일본 소부장 역사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