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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Dec 12. 2022

톱니바퀴에서 빠져나간 시간

마녀의 커피 한 잔

회계일은 날짜에 맞춰 촘촘하게 짜인 일정대로 동일한 업무가 반복된다. 같은 일이 반복되니,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어떤 일도 일정을 넘겨서 미뤄둘 수가 없다. 일정 안에서 한 기업체에 일어난 모든 금전적인 사건들을 정리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일이다. 사건 하나하나가 금전적인 경험으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게다가, 우리 회사처럼 직원 한 사람에게 할당대는 업무의 양이 차고 넘칠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날의 일은 그날에 끝내야 한다. 오늘의 일이 정리되지 않으면, 주간을 마감할 수 없고, 그다음엔 월말을,  또 그다음은 분기를 마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뭔가 하나의 정리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인생 전체가 망가진 상황과 비슷할 것이다.  


지금껏 회사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그런 어이없는 사고를 친 적이 없었건만. 내가 정말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었던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아침나절 엉망으로 점검한 전표 덕분에 나는 꼼짝없이 야근을 하게 생겼다. 나는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커피를 마시러 탕비실로 향했다. 


나는 한참 동안 탕비실의 수납장을 뒤적이다가, 아직 퇴근 전인 선배 L을 찾았다. 우리는 탕비실 관리를 1년마다 돌아가면서 하는데, 올해는 그녀가 담당자다. 그녀는 절반쯤 꺼진 전등 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장을 고치며 퇴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선배, 커피통 어디에 두었어요?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표정으로 마스카라를 바르며 말했다. 사방 천지에 커피잖아. 그것도 종류별로. 아닌 게 아니라, 탕비실 탁자 위에는 요즈음 나오는 인스턴트커피들이 색깔마저 곱디곱게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이것들 말고, 내가 늘 마시던 원두커피요. 그녀는 머리에 감아놓은 구르프를 풀어 정리하며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지가 언제부터... 귀에 들리지 않는 사람의 속마음이나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 것은 생각해보니 팀장 K만의 특기는 아니었다. 나도 어쩌다 보니 그런 능력이 생겨버렸다. 언제부터 그런 능력이 생긴 걸까? 그러다, L이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잘 찾아봐. 


나는 탕비실 구석구석을 정리하듯 뒤져서 한참만에 원두커피를 찾아냈다. 이번엔 필터지와 드리퍼가 문제였다. 나는 또 필터 지를 찾기 위해 탕비실을 뒤졌다. 왜 그것들이 거기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필터지와 드리퍼는 냉동실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나는 정성스레 물을 끓이고, 드리퍼와 컵을 데웠다. 그리고 원두 통을 여는 순간.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원두 통 안에 코를 대고 냄새를 다시 맡았다. 커피 냄새가 아니었다. 아니, 커피 냄새는 맡았지만, 살아있는 커피의 향이 아니었다. 이미 생명과 영혼이 날아가버린, 그런 냄새였다. 보통 사람이 맡기에는 질이 좋지 않은 담배 냄새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원두 통에 찍힌 유통기한을 찾아보았다. 벌써 삼 년, 아니 사 년도 넘었다. 내가 회사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커피다. 그리고 선배 L이 빠꼼히 탕비실 안으로 얼굴을 내밀며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무슨 일이야? 커피에 목숨을 거는 것도 아니고, 

지금껏 줄기차게 인스턴트커피만 마시던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원두를 다 찾고 그래? 


제가요? 그 순간 가장 의아한 생각이 든 것은 선배 L 보다 나 자신일 것이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껏 삶의 모든 여정을 커피와 함께 했던 사람이다. 태어나서 처음 맡은 냄새가 엄마의 냄새가 아닌 커피의 여러 가지 향기였고, 그 보다 더 자라서 말을 하고 걸음마를 할 무렵엔, 세상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커피를 통해서... 


그러다 나는 그 모든 생각들을 말로 뱉은 것 마냥,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뭔가, 이상했다. 내가 아닌 선배 L의 말이 맞았다. 내가 가진 기억을 통틀어서 뒤돌아보건대, 어제의 나, 아니 오늘 아침의 나와 지금의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여겨졌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 아침까지 나의 모습을 하고, 이 사무실에 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가 궁금했다. 마치 커피를 모욕하듯, 내 앞에 색색으로 놓여있던  믹스커피 제품을 틈틈이 마시면서 입맛을 다시던 서른넷의 그 여자. 

   

그런 내 눈에 굵은 고딕체로 숫자가 채워진 11월 달력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오늘이 며칠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곧장 사무실로 나가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11월 19일이었고, 그것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이내 알람이 울렸다. 소개팅이란 단어가 알람과 함께 스마트폰 위에 보였다. 오늘이 19일이라고? 어제나 엊그제가 아닌 오늘이? 그리고 내 머릿속에 그리 길지 않은 곱슬머리에 마른 체격을 가진 한 남자의 얼굴이 떠 올랐다. 내가 소개팅으로 만난 그 카페 주인이었다. 나는 이미 그를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또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허겁지겁 옷가지를 챙겨 들고 남자의 카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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