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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웅 Aug 18. 2021

화양연화

왕가위

아이러니하다.

<화양연화>는 내 인생의 영화를 꼽을 때마다 늘 첫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자신 있게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이 작품을 처음 본 때가 언제인지. 보통 강렬한 첫인상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법인데 <화양연화>는 처음이 흐릿하다.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마 20대 후반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쉽게 사라지지 않는 여운에 빠져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꼭 <화양연화> 같은 작품을 만들겠다 다짐했겠지. 그 다짐을 할 때의 떨리던 순간은 지금도 느낄 수 있다. 이후 30대의 시간을 보내며 여러 번 <화양연화>를 다시 보곤 했다.



2020년의 마지막 날에도 난 <화양연화>와 함께했다. 코로나19의 기세가 여전했지만 홍대 롯데시네마에서 홀로 <화양연화>를 보며 한 해를 마무리한 건 지금 생각해봐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캄보디아의 한 사원에서 비밀을 털어놓고 걸어 나오는 차우(양조위)의 모습은 지금 이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내게 많은 것을 일깨워줬다. 

전에는 항상 붉은 조명이 켜진 모텔에서 오지 않는 수리쩐(장만옥)을 기다리다 쓸쓸히 짓는 차우의 미소가 영화의 최고 명장면이라 생각했었다. 차우가 조용히 불을 끄고 모텔 방을 나온 후 흘러나오는 ‘Quizas, Quizas, Quizas’는 언제 들어도 세련되고 멋있었다. 지금도 물론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2020년의 마지막 날에는 영화의 마지막에 캄보디아의 한 사원에서 비밀을 털어놓고 홀로 걸어가는 차우의 모습, 당당한 걸음과 의연한 눈빛을 오래도록 기억하기로 했다. 지금은 차우처럼 지난 과거는 묻어버리고 다시 앞으로 나가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화양연화>를 통해 깨닫는 건 인생에서 선택이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선택을 위한 연습은 허락되지 않기에 선택에 따른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옳고 그른 선택이었는지 판단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선택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길 좋아하고, 그 판단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판단이란 걸 쉽게 할수록 후회와 죄책감은 커진다.


<화양연화>를 통해 깨닫는 건 인생에서 선택이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선택을 위한 연습은 허락되지 않기에 선택에 따른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할 수밖에 없다.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뜻한다. ‘눈 깜짝할 사이의 매우 짧은’ 순간은 기억을 통해 '영원'이 될 수 있다.

다소 용기가 없고 소심하게 느껴졌던 차우의 행동과 선택은 자신을 포함해 수리쩐의 삶까지 불행하게 만든 것일까? 어쩌면 차우는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차우의 선택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감독은 세 가지 미장센을 사용한다. 바로 붉은 조명과 느린 화면, 그리고 음악이다.

차우에게 있어 좁은 계단에서 수리쩐을 우연히 마주치고, 쓸쓸한 밤거리를 수리쩐과 함께 걷고, 수리쩐과 무언가에 함께 몰두했던 순간들이 모두 <화양연화>였다는 걸 감독은 미장센으로 관객들에게 설명해 준다.



특히 <화양연화>를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처럼 오래도록 기억하게 해주는 것은 양조위(차우)와 장만옥(수리쩐), 두 배우의 미소 때문이다.

차우는 수리쩐과 함께 무협 소설을 썼던 모텔에서 수리쩐을 기다리지만 결국 수리쩐은 오지 않는다. 붉은 조명 아래에서 차우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미련을 버리고 <화양연화>를 선물했던 모텔방을 나온다.

차우가 싱가포르로 떠난 후, 수리쩐도 차우를 만났던 아파트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1년 뒤 주인아주머니를 보기 위해 잠시 아파트에 들른다. 수리쩐은 자신이 생각에 잠긴 채 풍경을 바라봤던 창문에 다가가고, 예전처럼 창문 밖을 바라보다 울컥한다. 차우와 함께했던 <화양연화>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살면서 우리도 한 번쯤은 차우와 수리쩐과 같은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 미소는 각자 자신만의 <화양연화>를 떠오르게 해주는 스위치다.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고, 기억하고 싶은 일보다는 잊고 싶은 일이 많은 법이지만, 그래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건 각자의 마음속에 지닌 이 스위치 때문일 것이다.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내 삶에도 미소를 짓게 하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다는 걸, 어쩌면 그 순간이 내게도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추억과 희망이 또 다른 오늘을 살게 한다.


사원을 떠나는 차우의 모습처럼 오늘을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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