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팔로 쓰는 앎Arm Apr 26. 2020

'프로이직러'가 동기 A에게

동기 A는 나를 '프로이직러'로 치켜 세우곤 했다. 어딜 가나 잘 적응하고 곧잘 자리를 옮긴 후엔 진득히 붙어있는다는 게 A의 평이었다. A는 종종 연락을 해와 이직에 대해 묻거나 어떻게 이직해야 하는지, 이직 결심이 어떻게 서는지, 평가는 어떻게 되는지 등을 묻곤 했다. 나로서는 잘 모르지만 최대한 답을 하곤 했다. 이직이란 것, 나는 잘 모른다. 내가 이직을 감행해온 것은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였을뿐, 별도의 계산 등의 결과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인생에서 살아가면서 내 자신이 말하는 마음의 소리, 그 소리에 나는 그저 솔직하게 대응하며 판단을 내려왔을 뿐이었다. 어쩌면 판단이란 단어도 거창할지 모르겠다. 난 그저 내 안의 부름에 응답해왔을 뿐이다.


첫 번째 이직은 안 좋은 일을 겪고나서였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같은 안 좋은 일을 겪고나니 나는 지금 와서 생각하건대, 강하지만 조금은 피폐해졌다. 마음에 입었던 상흔들은 이까짓거 라는 거창한 마음을 먹게 만들었다. 하여 나는 그 좋아했던 회사를 그만두고 더 좋은 회사가 있을 거란 확신에 별로 아파하지도 않았더랬다. 그저 숨을 고르곤 다음 회사를 골랐다. 그렇게 고른 회사서 또 같은 안 좋은 일을 겪었다. 몇 번이고 술자리서 희롱, 추행 등을 겪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자 나는 이 일 따위가 싫어져 버리게 되었다. 일은 사랑했으나 그 문화가 싫었달까. 이는 옳고그름의 문제가 아닌, 당연히 틀린 행위들에 대해 나 혼자 여자라는 이유로 참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들에 대한 환멸이었다. 


아무리 정의를 외쳐대고 관련 보도를 해내며 멋진 척을 해대도 속으로는 그리 곪은 매체라면, 나는 토악질이 나왔다. 지금에야 페미니즘 움직임이 커지는 등 직장내 성추행 등의 문제가 더 예민해졌으나, 그 땐 그마저도 아니어서,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이 힘들어지는 구조였다. 사실 지금도, 언론 등에 보도되는 정의로운 목소리들 뒤, 그리고 사각지대에는 저리 참는 자들의 목소리, 문제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부끄러워 마땅할 자신들의 더러운 손, 눈을 자랑스레 말해대는 행위들이 있으리란 걸,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실망하지 않는다. 그게 세상의 한 부분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문제제기는 하되, 그들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변태들이 어찌 정신승리하는지, 변태들이 자신이 변태라는 것도 어찌 모르는지 잘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회사는 막중한 책임을 주었다. 갑작스레 온 기회들에 나는 진중해져서는 열심히 해내었다. 어려서부터 나의 유일한 장점은 글쓰기, 언어 능력, 성실성이었다고 나는 조금 짜게 생각하며 자부한다. 거기에 감각있다는 평을 들어왔으니, 제법 지금껏 일한 회사들에서 나는 좋은 평가를 들어왔고 줄곧 '1등'이라는 수치적 평가도 받아내었다. 이 회사에서 나는 경력직에 나이도 어린 여자가 갑자기 좋은 자리에 앉은 것에 대한 편견 따위에 맞서 싸우느라 굉장히 고통스러웠지만 이전에 비하면 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만지고 물건화화하는 게 아니라 별 되먹지 않은 의심과 열등감의 눈초리였으므로 그저 무시하고 소통해 내면 되었다. 


인간군상은 다양하므로 대개 만지거나 어떻게 하려는 강압성을 가진 인간을 만나는 게 아니라면 나는 그저 '그러려니' 하는 인간이 되어 토악질나오는 일상을 그저 그렇게 잘 견뎌내었다. 그러면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열등감을 품고 그것을 정당화한 후 표출하다가 혼자 폭발, 혼자 나가 떨어져 나가는지 등의 과정을 목도했다. 조직에선 그 어린 아이를 문제화했으나 나는 그 아이가 불쌍했다. 어려서, 치기가 많아서, 환상이 커서, 상처가 너무 많아 보여서 어디 다른 데 만만한 곳에 풀고 싶어서 매번 화가 가득차서는 선배들에게 속칭 '개기는' 그 아이가 나는 참 불쌍했더랬다. 남의 눈을 너무나 의식하면 그리 된다.


막중한 책임을 주던 회사의 대표가 다른 곳으로 가고, 내개 더 큰 책임과 권한 등이 생기려 하자 나는 조금 두려워졌다. 더 똑똑하고 좋은 사람들 속에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언제나 배움에 목말랐고, 나는 아직 어렸다. 또 하나는, 더 이상 이 일을 하지 않아도 어쩌면 괜찮을 거란 확신이 더해졌다. 나는 기자를 그리 오래 꿈꿔왔으면서, 그 환멸이 커지는 것을 느끼며 버텼더랬다. 이미 그 일은 첫 회사서 어떤 일을 당한 후 와장창 깨졌지만, 지금에서야 그 균열이 거기서 시작되었을 수 있겠다 혹은 그 땐 그래도 다른 곳 가면 없겠다는 환상에 버텼겠다 등의 추측을 할뿐. 어쨌든 피부로 더 이상 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해 결단을 내렸던 건 이 회사에서였다. 다른 일을 해볼까. 잠깐 쉬어볼까. 당시 공황장애를 얻고서는 이 생각을 했더랬다. 공황장애는 이 회사에서만 얻었다기보다는 그 전의 회사에서 안 좋은 일들을 당하면서 누적됐던 상처였다. 좀 쉬면서 농도를 얕게 만들어 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한 달을 쉬면서 나는 결국 또 다른 회사로 금세 이직을 했다. 오라는 데들을 면밀하게 살피고 기업문화를 최우선에 뒀다. 이 일을 하면서 학벌, 여자, 나이 등으로 별 일을 다 당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기대도 환상도 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직을 물어오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지, 더 이상은 해줄 수 있을 말이 뭐가 있을까 하냐면... '어딜 가나 똑같다' 다만 '변태들이 있는 곳은 가지 말라' '변태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면 어딜 가나 같다' 그리고 '어쨌든 큰 회사가 좋다'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이냐. 배움이냐 경력이냐' 냉정하게 자신만의 잣대를 세우라는 것 정도다. 사람마다 속도와 방향, 선택 지표가 자신이 처한 성장시간표 속의 시간대에 따라 세심하게 달라지므로 그 때의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힘들어도 자신만의 명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또한, 그래야 뭐 같아도 명분 덕에 참으며 하루를 영위해낼 수 있다. 


또 하나는, 일과 자신을 분리하라는 것. 그렇게 할 수 없는 우리 일 특성상 참 어려운 주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라도 그런 연기라도 하라는 것. 스위치를 끄는 날을 하루라도 만들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생각지표가 달라질지 모르니. 대개의 생각지표는 그러면 달라지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그 회사 자체가 이상한, 예를 들어, 한쪽 성별에 치우치거나, 변태들의 집합소거나, 뭘 강요한다거나 하는 곳이라면, 그 생각지표는 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 땐 이직을 감행하라는 것. A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겠다. 할 말이야 쓰면 계속 되겠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매거진의 이전글 현실감 없이 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