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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햇살 May 14. 2021

내가 받은 청렴 자가진단키트

촌지의 기억

 10년 전 오늘(그 해의 스승의 날은 일요일이었고, 그 해까지는 놀토가 있어서 격주로 토요일도 출근했다.) 우리 반 아이들이 스승의 날 기념 파티를 준비했다. 평소엔 말도 잘 안 듣는 개구쟁이들이었지만, 그 날만큼은 풍선도 달고, 자그마한 케이크도 사 오고, 날 위해 준비해 준 이벤트로 감동의 눈물이 질끔 새어 나왔다. 이벤트의 대가로 온통 널브러진 쓰레기 가득한 교실 청소는 온전히 내 몫이 되었지만, 경력 2개월 2주 차 담임에겐 준비해준 예쁜 마음이 더없이 크게 느껴졌다.

 

 전교생이 깜짝 파티로 떠들썩한 하루, 학생의 날인지 스승의 날인지 분간이 안 되는 아이들이 더 신난 하루. 준비했다는 뿌듯함으로 주체할 수 없는 감정 과잉 상태의 아이들은 수업 내내 “파티 준비해줬으니 영화 틀어줘요.”라고 반협박식으로 요구해온다. 수업을 해도, 영화를 봐도 어수선한 하루. 빨리 하루가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딩동댕동, 댕댕딩동’ 마지막 하교 종소리가 반갑게 들려왔다. 가방을 싸고 하교하는 애들 사이 쭈볏쭈볏 예준이(가명)가 걸어 나온다.


“선생님, 엄마가 이거 주래요.”


책 한 권을 건네 온다.


“응, 고마워 예준아.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출처:unslpash

 

 아직 김영란법(2016.9.28 시행)이 생기기 훨씬 전이라 책 한 권 정도는 가볍게 받을 수 있었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오므리던 예준이가 이내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싼다. 나를 힐끔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미소를 내성적인 예준이식 하교 인사쯤으로 받아들이고, 몇 시간 사이 가득 쌓인 업무 메신저 쪽지함을 열어보려는 중이었다.. 아까 받았던 책을 옆으로 옮기려 짚으려는 순간 ‘툭’... 하얀 정체불명의 봉투가 떨어졌다. ‘편지인가?’ 하며 열어보니 세종대왕 열 분이 날 스윽 쳐다보고 계셨다.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받을까 말까 하는 고민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경력 2개월인 나로선 ‘어떻게’ 거절하는지조차 너무 버거운 미션이었다. 혹시 ‘받았다’라고 와전된 소문이 돌까 봐 두려워 주변에 조언도 구하지 못했다. 다른 학교 교사였던 발령 동기 친구 몇 명에게 혹시 촌지 들어왔냐고 물어봤지만 다들 요즘도 촌지주는 사람이 있냐며 되려 궁금해하는 기색이다.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예준이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긴장됐다. 대략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겠다. 내일 예준이 편으로 돌려드리겠다.” 는 내용이었다. 어렵게 미션을 끝냈지만, 앞으로 남은 1년간 뻘쭘해지진 않을지 걱정되는 마음이 조금 올라왔다. 그 날 이후, 내게 촌지를 건네 온 학부모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그 촌지는 교직생활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봉투였다.

 

 문득 스승의 날이 다가오니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성인이 돼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엄마는 나의 학창 시절 내내 촌지를 주셨다고 한다. 아마 10년 전 오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봉투를 봤던, 그즈음이 촌지 있던 세대에서 없는 세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끄트머리쯤이 아니였을까 짐작해본다. 시대가 조금씩은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아 다행이다. 촌지 없는 시대라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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