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화이트.
하늘이 손바닥만한 시절 나도 겸손은 힘들어를 외치던 때가 있었다.
타고난 영특함과 매력을 어떻게 자제하냐며 나의 겸손은 오히려 오만이라며 세상의 주인공은 나라던 시절은 결혼 이후 바로 사라져 버리긴 했다. 시집 사회에서는 겸손을 얘기하는 것 조차 사치인 결혼한 아들의 부록이 되어버린 게 사실이니까. 그렇다. 겸손은 인간이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존재 자체가 미미한 부록 1호는 거기에 있다 혹은 없다 둘 중 하나로 존재감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이가 들고, 경험하는 사회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하늘이 손바닥만했다가 점점 커져가는 걸 느껴갈수록 내가 아는 것은 정말 아주 일부일 뿐 이구나를 깨닫게 되는게 동시에 과거가 매우 부끄러워지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된다. 멀쩡히 있다가도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편안히 침대에 누웠다가도 이불킥이 자연스럽게 될 정도로 엄청나게 부끄러운 일이 된다. 그런 일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시시때때로 있으니 그런 유치한 시기에서 빨리 벗어난 게 천만 다행한 일이다.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할 바엔 빨리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부끄러운 과거를 덜 만드는 최선이지 않나.
와인도 그렇다. 아니, 와인이 그렇다.
내가 좀 아는 것 같아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 미지의 세계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다.
와인이라고 하는 것이 워낙 다양한 스타일을 지닌 술이기도 하지만 기타의 상황에 따라 또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술이다보니 내가 어떤 스타일에 대해서 웬만큼 알 것 같다고 생각하다 보면 내가 알았던 것과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또 다른 스타일이 발견되곤 한다. 심지어 나는 '발견 되었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미 있었다'가 사실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와인 앞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활용해 어떤 스타일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유추할 수는 있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정보로 앞서 답을 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순간을 즐겁게 느끼려고 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말이다.
와인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좋은 와인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와인의 나라는 프랑스. 그리고 최고의 와인은 보르도. 그리고 조금 더 안다 하면 보르도 중에서도 메독을 이야기 한다.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그리고 와인에 대한 인상을 물으면 미각적으로는 달콤 쌉싸름, 시각적으로는 붉은 액체를 떠올린다. 게다가 '와인색'이라고 하는 색깔도 우리는 검붉은 색을 바로 연상한다. 역시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 와인에 대한 인식은 와인은 보르도 레드 와인이 가장 기본이 되는 건 토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쉽게 깨질 것 같진 않다.
자,..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보르도 메독은 레드 와인이 강세인 지역은 맞다. 그런데 보르도에서 와인이 유명한 지역은 메독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메독 밑에 있는그라브에서는 최고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와인이 생산되는데 그것이 바로 샤또 디켐이다. 샤또 디켐은 쎄미용이라는 포도로 아주 달콤한 화이트 와인을 만든다. 쎄미용은 보트리티스 시네레아(곰팡이 균)에 감염이 되면서 수분은 빠지고 당분은 응축된 노블롯(noble rot) 상태가 된다. 이 상태의 포도로 만든 것이 샤또 디켐의 와인이다.
샤또 디켐은 그라브 지방의 쏘떼른에서 생산이 되며 세계 3대 귀부 와인(noble rot wine)으로 꼽힌다.
정리하자면 보르도는 메독을 중심으로 한 레드 와인와 메독 외 지역인 쏘떼른에서 생산하는 귀부 와인이 유명하다.
여기까지 알았다고 해도 이미 초보 단계를 벗어난 것 같고, 무엇보다 샤또 디켐이 보르도였어? 혹은 3대 noble rot 와인이라든가 쎄미용이라는 포도 품종, 보르도에 메독 외에 그라브라는 지방이 있다는 추가적 사실도 알게 되면서 으쓱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다.
보르도의 대표 포도 품종 세 가지 하면 레드 와인을 만드는 까베르네 쇼비뇽, 메를로. 그리고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쎄미용이 제일 많이 이야기하고 일단락 된다.
이렇게 한참을 살다가 드디어 만나게 된 신세계가 다시 그라브.
그라브의 화이트 와인 바로 쇼비뇽 블랑과 쎄미용의 블렌딩 와인이다.
너무 우습게도 보르도 스타일의 화이트를 처음 경험한 것은 미국 와인이었다. 이 사실도 너무 웃기지 않나?
보르도 스타일의 화이트 와인을 보르도 생산이 아닌 미국 생산 와인으로 마시게 되었다는 것이 말이다.
더 웃긴 건 그 다음에는 칠레 와인이었다. 세상에나... 그렇게도 본토(?)의 와인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본토의 와인을 만나기 전 더 충격적인 일은 쇼비뇽 블라의 원산지가 바로 보르도라는 사실이었다.
쇼비뇽 블랑이 얼마나 보르도에서 많이 자랐냐면 보르도의 대표 품종인 까베르네 쇼비뇽이라는 이름은
까베르네 프랑에서 '까베르네'를, 쇼비뇽 블랑에서 '블랑'을 따서 이름을 까베르네 쇼비뇽이라고 지었다는 사실.
쇼비뇽 블랑은 프랑스 루아르의 대표적인 포도 품종이다. 잘 아는 '뿌이-퓌메'와 '상쎄르'는 쇼비뇽 블랑으로 산도가 높고, 과일향이 좋은, 깨끗한 느낌의 화이트 와인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쇼비뇽 블랑으로 유명한 나라가 있으니 바로 뉴질랜드다. 뉴질랜드의 쇼비뇽 블랑은 '뿌이-퓌메'와 '상쎄르'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와인을 만드는데 보다 강하고 찌르는 듯한 산도와 좀 더 푸릇한 과일향, 채소와 나뭇잎 향 등이 더 살아 있는 스타일의 와인을 만든다. 이에 더해 미국 나파에서는 쇼비뇽 블랑에 오크 숙성을 해서(보통 기존의 양조 방법에서는 쇼비뇽 블랑은 오크 숙성을 하지 않았다.) 버터향과 비스킷 향, 머스크 향까지 입힌 새로운 스타일의 쇼비뇽 블랑 와인을 생산하는데 이를 '퓌메 블랑'이라고 한다. 이렇듯 쇼비뇽 블랑은 사실 보르도에서는 생각하지 쉽지 않은 품종이었다. 흔히 말하는 3대 품종에도 들어가지 않고 말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좀 안다고 하는 시기에는 항상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리기 마련이다.
보르도는 쇼비뇽 블랑을 버리지 않았다. 드라이 화이트 와인을 버리지 않았다.
보르도의 교수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드니 뒤부르디유(Denis Dubourdieu)는 본인의 양조장과 다른 양조장을 컨설팅 하면서 쇼비뇽 블랑과 쎄미용을 블렌딩한 보르도 드라이 화이트의 기준을 잡았다. 두 품종을 적절히 블렌딩하고 오크 숙성을 한 보르도의 드라이 화이트 와인은 프랑스 루아르와 뉴질랜드. 그리고 미국의 쇼비뇽 블랑과는 또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적당히 풍성한 바디감과 과일의 복합미. 무엇보다 부드럽고 우아한 산미는 와인을 신선하지만 풋내나는이미지를 주지 않는다.
미국이나 칠레에서 만들어진 보르도 스타일의 화이트 와인을 마셨을 때는 어느 정도 바디감과 풍미가 있는 음식과 함께 마셔야 와인의 가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면 본토의 와인은 오히려 숙성된 생선회 정도의 바디감과 감칠맛 정도에 감동할 정도로 훌륭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오크 숙성을 통해 바디는 훨씬 풍성해졌고, 과일의 향미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내는 농축미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쇼비뇽 블랑에서 오는 신선한 산미는 강하게 찌르고 사라지는 산미가 아닌 부드럽게 입안을 지속적으로 자극시켜 식욕을 돋우는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와인 자체의 신선하고 상쾌한 컨디션을 느끼게 하는데 충분했다. 또한 단일 쇼비뇽 블랑 와인에서 느낄 수 없었던 나무의 향과 밀납의 향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나오는데 이 느낌 때문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와인이 진중해진다는 느낌이 생겨났다.
와인 이야기를 하면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음식과의 마리아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감칠맛이 있는 숙성회는 물론이려니와(사진은 츠게 마구로) 향이 풍부한 게와 새우등과는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매칭을 이룬다. 특히 사진 속에 와인인 끌로 플로리덴의 경우 쉬르-리의 방법으로 양조를 하면서 와인을 마시고 난 후 여운에서 효모향이 고소한 효모향이 나는데 이 향이 음식의 감칠맛을 살려내 입 안에서 음식과 와인의 향이 둥글게 감싸 안아지는 듯한 편안한 느낌을 준다. 예상컨데 봄이면 나는 두릅 숙회와도 굉장히 좋은 매칭을 보여줄 것이다. 신선한 두릅 향과 쇼비뇽 블랑의 갖는 특별한 아로마인 새싹 향은 상상할 수 는 있으나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나름 기대하고 있는 봄조개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새조개. 수박향이 나는 새조개를 샤부샤부해서 함께 한다면 이 또한.......
하나를 알면, 모르는 것 하나가 또 보인다. 그리고 그걸 알면 그것에서 가지를 친 또 하나의 미지의 세계가 다가와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나는 안다에서 나는 모른다로 생각의 변화가 생기면서 호기심은 점차점차 늘어나기만 하고 그것들을 보물찾기 하듯 찾아 다니다 보면 아는 것에 대한 기쁨, 우쭐함보다는 답을 찾아 가는 과정의 즐거움이 세상을 사는 기쁨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운이 좋게도 나는 와인을 좋아하니 주제 하나를 얻었지 않나 한다.
참 거창한 것이 아닌 것이 일상에 소소한 기쁨을 주니 와인이란 놈이 얼마나 기특한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