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일까 통제일까

사유

by 김기덕

회사 근처에 작은 시장이 있다. 휴식 시간이면 나는 종종 그곳을 산책하곤 했다. 시장에는 회색과 노란색, 흰색이 뒤섞인 암컷 고양이가 있었다. 나와 마주칠 때마다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고, 먹이를 내밀면 빠르게 먹어치운 뒤 쏜살같이 도망가곤 했다.


어느 날 그 고양이가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먹이를 더 챙겨주었지만, 어미는 새끼가 생긴 탓인지 더 경계심을 드러냈다. 시장 한쪽에는 오래 버려진 상가 건물이 있었는데, 깨진 창문 틈을 통해 고양이가 드나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이 그 고양이의 아지트였나 보다. 고양이는 상가 주변을 자신의 작은 영역으로 삼고 새끼를 돌보았다. 그러나 새끼 중 한 마리는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어미는 더욱 사람들을 경계했고, 시간이 흐르자 남은 새끼와 함께 상가 안에 숨어버려 시장에서 다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고양이가 상가 안에서만 새끼를 키운다면, 그 새끼는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길고양이는 야생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사냥법과 영역 다툼은 어미로부터 배워야 하는데, 어미가 사냥하지 않고 사람들의 먹이에 의존한다면 새끼는 그 기술을 전수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에게 다가가 친화력을 보이는 법을 배우는 것도 아니다. 결국 새끼는 자라서 독립해야 할 때 사냥도 못 하고, 사람과 어울리지도 못해 좁은 영역에 갇히거나 경쟁에서 밀려 도태되고 말 것이다.


우리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고양이처럼 먹이를 두고 싸우진 않아도,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노력하고 때로는 투쟁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협력 속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인간은 본성상 사회적 동물이다.” 개인은 홀로 성장할 수 없으며, 공동체 속에서만 배움과 성숙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현대 교육은 과연 이 점을 제대로 가르쳐주고 있을까?


스마트폰과 미디어가 소통의 창구가 되면서, 아이들은 온라인에서 협력할 기회는 늘었지만 정작 오프라인에서 부대끼고 부딪히며 배우는 경험은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학교를 마치면 놀이터에서 모여 역할을 나누고 함께 게임을 했다.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림을 배웠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 수 자체가 적어졌고, 부모들이 과잉보호로 학교 앞까지 마중 나와 아이들을 곧장 데려간다. 심지어 부모가 친구를 골라주기도 한다. 아이의 사회는 점점 더 좁아지고 닫혀가는 것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어 사회로 나왔을 때, 사람들과 협력하며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풀어내기보다 회피하며, 나는 사회생활에 맞지 않는다고 결론내린다. 결국 적응하지 못한 채 도태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아이를 소중히 여겨 보호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스스로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아이의 세계를 통제하는 것은 아닐까. 자녀를 위한 것인지,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 그 질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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