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이라는 의식

by 안개꽃 눈송이

봄이 오면 사람들은 이상할 만큼 달뜨는 느낌이다.


겨우내 몸 여기저기에 묻어 있던 칙칙함을 털어내고, 옷차림을 다소 헐겁게 고친다. 어떤 사람들은 개화 시기를 검색하고, 어딘가로 몰려가 길게 줄을 선다. 그러고는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거나, 거닐면서 위를 올려다보며 감탄한다. 아름답다느니, 눈이 부신다느니, 올해도 봄이 왔다느니 하는 말을 반복한다. 사진을 찍고, 사진 속 자기 얼굴을 다시 확인하고, 꽃보다 사람이 많은 길에서 기어코 “꽃이 참 예쁘다”라고 말한다.


이 광경을 너무 오래, 너무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보고 저렇게 황홀해하는가? 멀리 떨어져서 보면 자못 궁금하다. *^^*


물론 답은 간단하다. 꽃을 보는 것이다.


예전에 같이 근무하던 어떤 생물학 교사(---누군지 밝힐 수는 없다.---)의 수위(?) 높은 발언으로 들어가 보면 재미나다. 그의 입장은 생물학교과서의 표현 그대로이다.


그가 말한 생물학 교과서의 문장을 잠시만 빌려오면 사정이 약간(?) 많이 그로테스크해진다. 모든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벚꽃 아래에서 환하게 웃으며 올려다보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한 그루 나무가 봄철에 벌이는 대규모 생식 과정의 전시물이다.


꽃의 색은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 마련되었고, 향은 접근을 독려하기 위한 신호이며, 꿀은 노동에 대한 수수료다. 꽃잎의 곡선과 색채, 미묘한 반짝임과 향기의 농도는 모두 사랑이기 이전에 순수한 기능이다. 시가 아니라 설계이며 감상이 아니라 유인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노골적인 생식의 장면 앞에서 유난히 순결한 표정을 짓는다. 어떤 면에서 보면 참으로 묘한 종족이다.


우리는 꽃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말하지만, 사실 자연은 아름다움 같은 추상어에 별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연이 관심 있는 것은 다음 세대다. 꽃은 감상을 위해 피지 않는다. 씨앗을 남기기 위해 핀다. 그러니까 꽃구경이란, 한마디로 말해 식물의 생식기를 관찰하고, 그 번식 홍보물을 구경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앞에서 유난히 고상해진다. 목소리를 높이고, 술 한잔도 하며, 부드러운 음악을 틀고, 산책을 하고, 봄을 찬미한다. 다른 종들의 생식의 현장에서 이렇게까지 품위를 유지하려 애쓰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꽃축제라는 말 자체가 이미 대단하다.


축제라니!!!!!!


무엇을 기념하는가? 식물이 가장 적극적으로 짝짓기 할 준비를 마친 계절을, 우리는 지역 경제와 관광 산업과 연계하여 대대적으로 기념한다. 현수막을 걸고, 포토존을 만들고, 주차장을 정비하고, 야간 조명을 설치하고, 먹거리 부스를 연다.


사람들은 줄지어 와서 생식기관 앞에서 셀카를 찍고, 그 사진에 하트를 붙이고, “인생샷”이라는 이름으로 저장한다. 번식의 현장은 어느새 콘텐츠가 되고, 콘텐츠는 체류 시간이 되고, 체류 시간은 매출이 된다. 꽃은 수정되기를 바라지만, 인간은 인스타와 트위터 쇼츠에 업로드되기를 바란다. 양쪽 모두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남기려 한다는 점에서만 비슷하다.


벚꽃 아래 연인들의 표정도 가만 보면 흥미롭다.


그들은 대개 꽃을 보러 왔다고 말하지만, 사실 꽃은 배경이고 서로가 본론이다. 꽃은 늘 그렇듯 누군가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데 동원된다. 고백도 꽃 아래서 하면 더 순정적으로 보이고, 이별도 꽃 아래서 하면 조금 더 문학적으로 포장된다.


인간은 자신들의 감정에 무대가 필요할 때마다 꽃을 세운다. 식물 입장에서는 꽤 억울한 일일 수 있다. 자기들은 그저 화분을 수분시키고 종자를 맺으려 애쓰고 있을 뿐인데, 그 밑에서 인간은 사랑을 확인하고, 우울을 달래고, 청춘을 회상하고, 늙음을 탄식한다. 꽃은 생존을 위해 피었는데 인간은 거기다 추억을 투사한다. 그 무심한 오용이야말로 인간적인 재능인지도 모른다.


더 우스운 것은 우리가 꽃의 짧은 수명을 유난히 사랑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금방 져서 더 아름답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얼핏 깊어 보이지만, 사실 상당히 잔인하다.


금방 사라지기 때문에 소비 욕구가 더 자극된다는 고백을, 인간은 늘 철학처럼 포장해 말한다. 한정판에 열광하고, 제철 메뉴에 줄을 서고, 이번 주말이 지나면 끝이라는 문장에 조급해지는 마음과, 꽃이 금방 져서 아름답다는 감상은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덧없음은 종종 고귀함보다 마케팅에 가깝다.


벚꽃은 비에 한 번 쓸려가면 끝나고, 그래서 사람들은 더 서두른다. 자연의 무상함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필사적으로 촬영한다. 사라질 것이므로 눈에 담겠다는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사라질 것이므로 저장하겠다는 뜻에 가깝다.


꽃구경의 군중성도 흥미롭다.


혼자 조용히 꽃을 보는 일보다, 남들도 다 보러 가는 꽃을 보러 가는 일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개화 소식이 뉴스가 되고, 만개 예보가 여행 계획이 되며, 특정 장소는 순식간에 인증의 성지가 된다. 우리는 꽃을 보기 위해 가는 것 같지만, 어쩌면 "꽃을 보러 간 자신을 확인"받기 위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봄을 놓치지 않았다”는 보고. “나도 아직 감탄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는 증명. “나는 삭막한 일상 속에서도 자연을 사랑하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자기소개. 꽃은 늘 입이 없으므로, 인간은 그 앞에서 자기 얘기를 더 많이 한다.


그래서 꽃구경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일종의 현대적 의식처럼 보인다.


우리는 정해진 시기마다 개화 지도를 확인하고, 적절한 시간에 이동하여, 가장 화려한 개체 앞에 서고, 스마트폰을 들어 기록하며, 함께 온 사람과 음식을 나누고, 짧은 감탄사를 주고받는다. 이것은 거의 제례에 가깝다. 차이가 있다면 제단 대신 가로수가 있고, 향 대신 커피가 있으며, 기도 대신 촬영이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의식의 중심에는 늘 같은 역설이 놓여 있다. 생물학적으로는 아주 노골적인 번식의 표지 앞에서, 문화적으로는 누구보다 청아한 표정을 짓는다는 역설. 인간은 그 모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순을 미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조금 너그럽게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일인지도 모른다.


생식의 구조를 알아도 찬란함을 느끼고, 기능의 목적을 이해해도 감탄을 멈추지 못하고, 번식의 전략을 보면서도 거기서 시를 길어 올리는 것. 그것은 위선이라기보다 재해석의 능력일지 모른다. 인간은 언제나 사물의 본래 용도 위에 다른 의미를 덧씌우며 살아왔다. 돌멩이를 신앙의 상징으로 만들고, 빵 한 조각에 추억을 묻히고, 계절의 변화에 윤리를 부여했다. 그러니 꽃의 생식기관을 보며 봄의 순결을 말하는 일 역시, 생각보다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 수 있다. 다만 우스울 뿐이다. 아주 정교하고, 세련되게 우스운 일.


결국 꽃구경이란 이런 것이다.


식물은 번식하려 하고, 인간은 감동하려 한다.


식물은 유혹하려 하고, 인간은 사색하려 한다.


식물은 씨앗을 남기려 하고, 인간은 사진을 남기려 한다.


서로 다른 목적이 한 장면 위에 겹쳐질 때, 봄은 유난히 화사하고 또 우스워진다.


그래서 나는 봄마다 꽃구경을 가는 사람들을 비웃지 못한다.


나 역시 그 무리에 섞여 걸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생식의 현장 앞에서 괜히 말투를 부드럽게 고치고, 한두 장쯤 사진을 찍고, 잠깐은 세상이 아직 살 만한 것처럼 느낄 것이다. 알고 보면 꽤 노골적인 구조물 앞에서, 끝내 아름다움을 느끼고 마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가장 우아한 자기기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부분의 축제가 그렇듯, 약간의 자기기만 없이는 봄도 제대로 시작되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봄 볕이 너무 좋아서...


아마도 비뚤어지고 싶은 내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이별의 지질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