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TV 화면 속 광장의 풍경이 떠오른다. 마이크를 든 기자가 권력 앞에 서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던 모습.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후예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불편한 물음으로 세상을 흔들었다. 질문은 그들의 존재 이유였고, 진실을 향한 실존적 투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광장은 변했다. 기자의 질문은 더 이상 진리를 추구하는 도구가 아니다. 날카로움은 무디어졌고, 질문은 계산된 문장으로 대체됐다. 그들은 무엇을 묻기보다, 어떻게 보일 지를 먼저 고민한다. 마치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 내 존재'가 아닌, 세상의 기대에 맞춘 '기계적 존재'로 전락한 듯하다.
그 변화의 단면은 너무나 선명하다. 2010년 G20 서울정상회의. 오바마 대통령은 예정에 없던 질문 기회를 한국 기자에게 먼저 주겠다고 했다. "한국어로 말해도 통역을 제공하겠다"라고 말했지만, 기자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 정적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었다. 그것은 질문을 포기한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 또 다른 현장이 남았다. 조국 전 장관 집 앞에 기자들이 모여서 지나가는 배달원에게 배달시킨 것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던져졌을 때, 나는 다시 생각했다. 이것이 과연 언론이 던져야 할 질문인가? 공인의 사생활을 파고든 그 질문은 권력에 대한 비판이나 사회적 의미가 아닌, 단지 호기심과 자극을 위한 것이었다. 질문은 더 이상 진리를 향하지 않고, 눈길을 끄는 방식으로 타인의 일상에 침입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어쩌면 현대 사회는 실존적 자아를 스펙으로 환원했고, 언론사도 예외는 아니다. 명문 학군의 엘리트들이 언론사의 자리를 채우며, 그들의 빛나는 이력서는 진실을 향한 열정보다 안정된 커리어를 약속하는 것으로 변했다. 언론사의 시험은 기업의 입사 시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논술은 점수로 환산되고, 면접은 말재주의 경연장이 되었다. 사르트르가 경고한 ‘타인의 시선’ 속에서 기자는 스스로를 위해 묻는 것이 아니라, 평가받기 위해 답변을 준비한다.
그러나 언론의 본질은 소크라테스적이다. 등불을 들고 “너 자신을 알라”는 명령은 곧 세상을 알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진정한 기자는 불편한 질문을 던져 세상의 가면을 벗기고, 어둠 속의 진실을 비춘다. 그것은 스펙으로 채워질 수 없는 실존적 용기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정답을 맞히는 자가 아니라, 정답을 의심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다.
스펙의 시대에 우리는 잊고 있다. 질문 없는 삶은 진리가 없는 삶이다. 언론이여, 다시 묻어라. 그 질문이 불편하더라도, 침묵을 깨는 순간 너는 다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