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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감 Aug 12. 2022

정신 승리

극단적으로 내 편이 되기

남의 말과 행동에 내상을 입을 때마다 SNS에 널리 힐링 글귀들, 이를테면 '너는 빛나는 존재야', '너니까 괜찮아', '넌 소중해' 이런 뜬구름 잡는 글들을 보면서 차오르는 눈물을 캔디처럼 삼킬 바에야 내가 빛날 수 없는 이유는 너 때문이라고, 너는 꽝이고 나는 짱이라고, 이런 나를 알아보지 못한 댁들이 진심으로 안타깝다고 생각해버리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 방법이 가진 (마력에 가까운) 매력은 혼자 생각만 하면 아무도 불편해지지 않으면서 나는 엄청나게 편해진다는 것이다. 내 탓이 아닐 때는 내 탓을 하지 말자. 내 탓일 경우에는 내 탓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애써 찾아 탓하며 정신 승리를 하자. 가만히 있어도 나를 까고 밟아대는 세상에서 나까지 나를 코너로 모는 것은 너무 가혹하니까. 나라도 제대로 각잡고 서서 내 편이 되어주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위 내용은 강이슬 작가의 <안 느끼한 산문집>의 일부이다. 내가 이 책을 사서 읽진 않았고, 활동하고 있는 필사모임에서 보았다. 이 부분을 필사하면서 모든 문장에서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정말 그래! 나를 위로한다고 서점에 깔려 있는, 예쁜 표지와 폰트와 삽화로 장식된 에세이들은 정말 뜬구름 잡는 글들이었어! 심지어 나는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캔디처럼 눈물을 삼키기는 커녕 조금의 위로도 받지 못했어!

몇년 전 나는 나름 내 인생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말해봤자 동감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위로받고 싶어 서점에 가서 그런 힐링 에세이 책을 찾아 몇 장을뒤적거려보았다. 아, 정말 전혀 와닿지 않았다. 책들은 내게, 내가 빛나는 존재이며, 내가 소중하고, 나니까 다 괜찮다고 말했다. 좋은 말이다. 우리는 하나하나 모두 소중하고 빛나는 존재이지 않은가. 악당이라도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고, 비록 악당이라도 태어났을 때는 사랑받을만한 아기였다.

그렇지만 그런 위로가 전혀 와닿지 않았던 것은, 그 책을 쓴 사람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 책을 쓴 사람은 스스로를, 또는 본인이 알고 있는 주변 사람을 위로하는 글을 썼을 것이다. 그 위로는 나를 향한 게 아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나를 위로하는가. 그 위로는 정말 뜬구름 잡기였고, 내 주위를 겉돌다가 흩어질 뿐이었다.

나를 응원한다며, 오늘도 수고했다고 말하는 아름다운 노래가 있었다. 나는 그 노래 가사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수고했다고 말하는 그 노래가 뜬구름 잡기처럼 들렸다. 내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저 수고했다고 말하는 가사는, 정말 내가 힘든 날 들으면 위선같았다.


진짜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건 나 자신이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누워,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고, 나를 힘들게 한 일들을 일기장에 쏟아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견디고 집으로 돌아와 이렇게 누워 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그렇게 하루를 만들어 낸 나 자신을 칭찬하고 다독이는 것은 나 자신이어야 했다.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내가 어떻게 힘들었는지 가장 잘 아는 건 나 자신이었다. 일기장에 힘든 일을 쓸 때는, 그 글은 일기이기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한 사람과 힘들게 한 일들에 대해 온갖 나쁜 평들을 쏟아냈다. 그 순간 나는 가장 신랄한 영화평론가였다. 일기를 쓰고 나를 다독이는 시간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괜찮은 사람이었다. 모든 건 세상 탓이었고, 나는 그 세상과 워 버텨낸 사람이었다.

지나친 자의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자의식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까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조금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고,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과하지 않게 사과하며, 내가 할 일을 무난하게 해내면 되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무조건, 무지성으로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이, 나를 잘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뜬구름 잡기 위로를 받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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