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랑바레/밀러피셔 증후군 #2
+ D6 금요일
Is it safe for me to stay at home tonight?
내 질문에 의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게 호흡 이상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의사는 집에 가도 될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을 하면서도 호흡 이상이 생기면 당장 병원에 찾아오라 재차 강조하였다.
집에 도착하니 벌써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정신없이 집에 오느라, 병원 환자용 종이 팔찌를 아직도 끼고 있었다. 쭉 뜯어버리려던 찰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갑자기 병원으로 실려가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떡하지? 나 스스로 누군지 설명할 길도, 설명해 줄 사람도 없을 텐데...
팔찌에 적혀있는 내 환자 바코드라도 있어야 상황이 쉽게 흘러가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팔찌를 낀 채로 침대에 누웠다. 호흡에 문제가 생기면 당장 병원에 오라는 의사의 말이 맴돌았다. 갑자기 숨 쉬는 게 불편한 것처럼 느껴졌다.
자는 중간에 호흡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지금 말도 못 하는데 구조 요청은 어떻게 하지? 오늘 갑자기 팔 힘이 없어진 것처럼 손가락 힘도 없어지면 핸드폰도 못쓸 텐데 어떡하지?
긴 하루에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 와중에 집 문 잠금을 해제하고, 핸드폰의 암호도 풀고, 또 구급 번호가 몇 번인지 찾아놓고 나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 D7 토요일
무사히 아침에 눈을 떴다. 이제는 팔 뿐만 아니라 발과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복시 증상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고 시력도 많이 떨어졌다.
'이럴수록 영양이 중요하다는데 비타민을 좀 먹어볼까.'
찬장에서 영양제를 꺼내 먹는데 좀처럼 알약이 넘어가지 않았다. 입 밖으로 기다란 영양제가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물도 자꾸만 잘 못 넘겨서 콧구멍으로 흐르곤 했다.
오전 열 시 신경과 주치의와 상담이 있어 택시를 잡아탔다. 너무나 어지러웠다. 병원까지는 십분. 병원과 가까운 집에 사는 것을 백번 감사했다. 이십 분 거리였으면 못 버텼을지도 몰라.
몸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짐을 느꼈다. 19층 안내데스크에서 D섹션으로 가라고 안내를 받았지만 천장 위 붙어있는 큰 알파벳 사인조차 잘 보이지가 않았다. 요 며칠 찾아간 몸의 기억으로 찾아갔다.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챙겨 온 태블릿을 꺼냈다. 태블릿이 참 무겁게 느껴졌다.
말을 잘하는 상태에서도 짧은 의사와의 만남에서 정확한 진료를 보려면 해야 할 말을 미리 잘 정리해야 한다. 아예 말을 못 하는 내 경우라면... 정말 잘 요약정리해서 보여줘야 할 것이다. 이틀 만에 보는 주치의에게 그동안 안 좋아진 나의 상태를 글로 업데이트해야만 했다.
태블릿에서 노트 앱을, 노트 앱에서 새로운 메모 작성하기 버튼을 한참의 시행착오 끝에 찾았다. 내가 무슨 말을 쓰고 있는지는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타자는 그냥 감에 의존해 쳐야 했다. (나중에 보니 오타가 잔뜩이었다.) 아침에 태블릿을 챙길 때만 해도 내 상태가 이렇게 안 좋은 지는 몰랐다. 진료를 기다리며 메모를 작성했던 그때의 나를 묘사하는 제일 적당한 말은 고군분투일 것이다. 마음이 다급했다.
의사는 내가 힘겹게 적어온 메모를 보더니 그 메모를 통째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서는 응급 입원을 해야겠노라 하더니 조치를 취하느라 분주해졌다. 입원을 예상하고 병원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안도가 됐다. 그만큼 자신감이 떨어져 있었나 보다. 병원에 있으니 무슨 상황이 생겨도 누군가 도와줄 수 있다는 안도감이랄까. 그러고 보면 말이 안 나오기 시작한 순간부터 줄곧 병원에서 대기의자에 앉아있을 때 더마음이 편했다. 그 안도감이 그동안 집에서 혼자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웠는지를 설명한 셈이었다. 간호사는 병실이 준비될 때까지 내가 임시 병실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임시 병실에 반쯤 누워 대기하는 동안 살짝 눈물이 났다. 감정이 복받치는 것도 아니었고, 손이 떨리게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굳이 참으려면 참을 수 있는 눈물이었지만 그대로 흐르게 두었다. 점심 대신 요청한 과일을 가져온 간호사가 왜 우느냐 물었다.
Any Pain? 나는 고개를 저었다.
Anxious about the disease? 나는 정말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다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사과는 딱딱해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파파야 한 조각을 들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 한 조각을 아주 오랫동안 먹어야 했다. 입맛이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파파야는 달게 느껴졌다. 파파야, 내 너를 특별한 과일이라 생각한 적 없었는데 오늘 이후로 넌 나를 살린 과일이야.
간호사와 병실을 정하고 입원 수속을 하는데, 간호사가 내게 같이 있어줄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Boyfriend? Husband? Any family member? 나는 세 번 다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I am so sorry라고 하며 안되었다는 얼굴을 하고는 돌아갔다.
그 사실이 날 씁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얼마 전 아는 언니 K랑 수다 떨던 게 생각나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언니. 나는 있지. 오롯이 혼자라는 생각을 했어. 언닌 죽기 전 한 시간이 남았다면 누구랑 있고 싶을 것 같아?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난 홀로 있고 싶을 것 같아. 그 시간에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없어. 친구도 아니고, 부모님도 아니야. 파트너가 있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매 시 상황이 나빠지고 있었고, 물을 삼킬 수가 없었고 이제는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변기에 앉았다가 내 힘으로 일어설 수가 없어서 안전봉을 잡아야만 내 몸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 옆에 누가 없다는 사실이 묘하게 나를 편하게 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와 중 간호사가 들어와 드디어 병실이 준비되었다며 나를 휠체어에 태워 새 병실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