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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s Jan 02. 2023

극단의 고독과 공포 앞에서도 돈이 위로가 된다

길랑바레/밀러피셔 증후군 #3


입원을 결정하고 대기 병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간호사는 내게 와 이것저것을 설명해 줬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생리 주기까지 겹친 나는 몸 상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말이 나오지 않아 어느 것에도 토를 달기 싫었다. 뭐 하나 질문하려면 핸드폰에 적어서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5일 동안 입원을 하는 걸로 하고, 내 보험이 일인실까지 커버가 되니 일인실로 준비해 주겠노라 했다. 단, 오늘은 보험사가 문을 닫는 주말이니 선 결제를 해야 된다고 덧붙였다.


청구서 종이를 슬쩍 본 나는 머리가 아팠다. 62만 바트... 이게 대체 얼마야..

보험이 정말 커버되는 게 맞는지, 62만 바트가 얼마인지 머릿속으로 계산할 기운도 없어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사인해버렸다. 한참 뒤 계산해 보니 하루에 450만 원짜리 병실이었다.  


450만 원짜리 병실은 가히 호텔 객실에 견줄 만했다. 안정감을 주는 노란빛 조명에 아주 널찍한 병실. 한쪽 벽면은 통창으로 25층에서 내다보는 도시 뷰가 뚫려있었고, 그 창이 일부 천장면까지 이어져 병실에 누워서도 하늘을 시원하게 만끽할 수가 있었다.


내 방에는 수시로 간호사들이 드나들었고 혈압을 재기도 하고 안부를 묻기도 했다. 외로울 틈이 없었다. 그중 가장 어려 보이는 간호사는 나를 보자마자 안녕!이라고 밝게 한국말로 인사해 주었다. 평소에 나라면 안녕!이라고 대답하고, 너 한국어 참 잘한다!라고 하이톤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날의 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그저 작은 미소로 화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반나절 동안 급격히 지친 나는 드디어 깨끗히 시트가 잘 정돈된 환자용 침대에 누워보았다.

편안한 기분은 찰나, 몹시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살짝 일어나 보니 역시나 하얀 시트 위에 빨갛게. 휴...

여분의 생리대를 이미 다 써버린 나는 미안하고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간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간호사는 내게 여분의 속옷은 있느냐 물었다. 응급 입원을 한 내가 뭐든 있을 리가 없었다. 고개를 저었다.


몇 분 뒤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온 그녀는 내가 화장실에 가는 것과 옷을 갈아입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나는 혼자 하겠다고 거듭 거절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모든 것을 다 마친 후에는 나도 그녀의 판단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비참하지도, 좌절스럽지도, 많이 민망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 상황이 우스웠다. 며칠 전만 해도 하이힐을 신고 밤거리를 쏘다녔으며, 골프 클럽을 사 온다고 혼자 낑낑 들쳐 매고 집에 왔으며, 친구들과 팬시한 호텔에 가서 애프터눈티를 먹고 마사지를 받았다. 오븐이 사고 싶어 쇼핑몰을 한 시간이나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던 평소의 나는 한순간에 이 꼴이 되어버렸다. 노인이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똑같은데, 변하지 않았는데... 내 몸이 무능해지는 것 말이다.


이제야 정말로 모든 일정이 다 끝났다. 아직 저녁 시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오늘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아침만 해도 택시를 타고 혼자 병원에 왔는데, 이젠 혼자 걸을 수가 없다.  

전기 자극 검사도 했고, 몸에 침 같은 걸 꽂은 후에 심장 소리를 듣듯이 뭔가를 진찰하는 그런 검사도 했다.

입원 수속도 끝났고, 몇 천만 원의 병원비도 결제했지만 결국에는 보험이 커버해줄 것이다.


아직 확진을 받지 못했지만 아마도 내 병은 Guillain Barre Syndrom 인 것 같다.

구글에는 수많은 안 좋은 케이스들이 나오지만 나는 오직 베스트 케이스일 것이라 곧게 믿고 있었다. 불안의 씨앗을 조금은 갖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내 정신상태는 견고했다.

조금은 후련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김질했다. 여전히 지나치게 긍정적인 나 자신이 놀라울 뿐이었다. 쾌적한 병실에서 상냥한 간호사들과 함께 있어서 그런가.


만약 내가 차가운 형광등 불빛의 딱딱한 병실에서 여러 중증 환자들의 신음소리와 응급한 상황을 마주하면서 누워 있었다면 어땠을까. 누구 하나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어렵게 눈치 보며 꺼낸 내 민망한 부탁에 차가운 눈초리로 응답받았다면. 비교적 건강하고 여유로운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아, 돈이 중요하구나. 극단의 고독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돈이 위로가 되겠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하. 돈을 벌긴 벌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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