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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순댕 Jun 21. 2023

하지

비가 내리면 좋은 날

2023.06.21

[하지]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낸다.


오늘 다행히도 비가 내렸다. 기우제는 지내지 않아도 되겠다, 라고 창 밖을 보면서 생각했다. 현재는 그친 상태인데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 껴 있었다. 하지만 기분은 울적했다. 무엇때문인지 이유는 알고 있었지만 쓰진 못하겠다. 내가 에세이를 잘 쓰지 못하는 이유와도 동일하다.

나는 내 삶을 솔직하게 말하는 데 저항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감정은 한순간일 뿐인데 글은 계속 남는다. 예전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내가 거짓말쟁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나의 초라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까봐 망설여진다. 익명이고 아무도 내 글을 보지 않는 순간 조차도 나는 솔직하게 쓰지를 못한다.

다이어리에 펜으로 일기를 쓸 때도 그렇다. 혹시 가족이 보면 어떡하지? 걱정하다가 에이, 안볼거야 하고 썼던 말들을 나중에 가서 매직으로 긋는다. 혹시 보면 어떡해. 그렇다고 내 방에 누가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없을 때 들어올 수도 있지 않나? 생각이 계속 도돌이표다.

원랜 블로그에 아주 솔직한 글들을 많이 썼었다. 하지만 블로그에 쓴 다른 정보 글이 꽤나 인기를 얻으면서 블로그 방문자 수가 폭팔적으로 느는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내 솔직한 감정의 글들을 모두 비공개 처리를 했다. 지금은 그렇게 많이 들어오지도 않고, 방문자 수 중 대부분은 2~3년 전 정보글을 보러 오는 사람들 뿐이지만 여전히 솔직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냥 오늘 뭐 먹었는지, 본 드라마의 감상 정도만 쓸 뿐이다.

대충 아무거나 찍어봄
절기 상 낮 시간이 가장 길다.

요즘 들어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누군가에게 거부 당하거나 울거나, 악을 쓰며 소리치는 꿈을 꾼다. 기분 좋은 꿈을 꿔 본지는 언제인지도 기억 안날 정도로 오래 됐다. 안 꾸거나 나쁜 꿈을 꾸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래도 예전보다 나아진 건 예전의 꿈에선 소리 치지도 못했다. 말을 하고 싶은데 목이 꾹 막히면서 말도 안나왔다. 근데 요즘은 소리는 지른다. 그래서 소리지르는 나쁜 꿈이더라도 ‘좀 나아졌네.’ 라며 위안을 삼는다.

차라리 꿈에서라도 때리지, 왜 때리지 못할까? 먹고 싶은게 있으면 그냥 먹으면 되지, 왜 줄때까지 기다리다가 결국 못 먹을까? 도망치고 싶으면 달리면 되지 왜 달리지 못할까?

‘억압’ 이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사전에 찾아보니 ‘자기의 뜻대로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지로 억누름‘ 혹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과정이나 행동, 특히 충동이나 욕망을 억누름.’이라 되어있다.

난 무엇을 억누르고 있는 걸까?

대충 아무거나 찍어봄2


이때쯤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원랜 이부자리를 깨끗이 하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 때문에 일어나서 이불을 쫙 피고 베게도 칼각으로 정리했다. 청소를 해야 운이 흐른다길래 방 정리도 깔끔하게 했다. “What u eat, Who u are” 이란 말 때문에 밥도 잘 차려먹으려고 했고, 내 옷차림으로 나를 드러낸다길래 옷도 잘 입고 다니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요즘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힘들다. 밥먹는 것도 귀찮고,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것도 귀찮고, 화장실 청소하는 것도 귀찮았다. 모든 걸 하려니까 시작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엔 대충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날 잡고 화장실 청소를 하려 하지말고 하루에 변기 한 번 대충 물때만 닦고, 다음날엔 바닥 한번 스윽 닦고, 그 다음날엔 세면대 한번 스윽 닦았다. 이부자리도 귀찮으면 대충 일어난 채로 놓고, 다음날에 펴고 싶으면 폈다. 옷도 조거 팬츠에 티셔츠. 딱 이렇게 입는다. 물론 세탁한 깨끗한 티셔츠다. 밥도 잘 차려 먹으려고 하지말고 대충 때우려고 한다. 일단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게 최우선이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들지 않게끔 소위말해 결핍을 느끼지 않으려고 했다. 잘 살려고 하지 않으니 삶 자체가 심플해졌다.

좋은건가? 아직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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