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31일, 나는 회사를 퇴사했다. 두 번째 퇴사였다. 그 사실 자체는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당일에도, 그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어떤 기분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퇴사 당일에는 일부러 조금 여유를 두고 내 상태를 정리해보려 했지만, 머릿속을 채우는 감정이나 느낌이 또렷하게 잡히지 않았다. 차분한 것도, 들뜬 것도 아니었고, 불안한 것도, 후련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감정의 빈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어제 테니스를 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시간의 두 얼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낯설고 복잡한 감정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어쩌면 이 개념들이 실마리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크로노스(Chronos)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시간이다. 시곗바늘처럼 흘러가고, 달력처럼 반복되며, 숫자로 측정 가능한 시간이다. 출근 시간, 생일, 학기 시작일처럼 외부에서 주어지는 시간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며, 선형적으로 쌓여간다.
그런데 카이로스(Kairos)라는 또 하나의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내면에서 "의미로서" 경험되는 시간이다. 어떤 하루는 그저 지나가지만, 어떤 하루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같은 1시간이라도, 누군가에겐 아무 감흥 없이 흘러가고, 누군가에겐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카이로스는 그렇게 순간의 밀도와 감정의 흔적으로 존재한다.
이 두 개념을 처음 접한 것은 몇 년 전, 회사에서 프로젝트 이름을 정할 때였다. 우리 팀에는 PM이 프로젝트 명을 정하는 묵시적인 관행이 있었고, 나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이나 당시 읽던 책에서 영감을 받아 이름을 붙이곤 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 개념이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그때 진행하던 프로젝트에 "Project Kairos"라는 이름을 붙였다. 프로젝트의 성격과는 큰 관련이 없었지만, 나는 그 안에 나름의 바람을 담았다. 그 일이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기억에 남는 시간, 하나의 전환점 같은 카이로스가 되기를 바랐다.
지금의 나는 다시 그 개념을 떠올리며, 내 두 번의 퇴사를 바라본다. 흥미롭게도, 2017년의 나와 지금의 나는 크로노스적인 관점에서 보면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첫 회사를 2017년 1월 31일에 퇴사했고, 그다음 날인 2월 1일에 바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지금, 2025년 7월 31일에 두 번째 회사를 퇴사했고, 바로 영국으로 떠나 대학원 과정을 시작한다. 퇴사 시점도, 학업의 시작도 거의 같은 구조로 반복된다. 마치 복사해서 붙여 넣은 듯한 구조다. 그래서 이 상황 자체는 나에게 낯설지 않다. 오히려 익숙하고, 그래서인지 내 감정의 흐름도 일정 부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다른 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도 사소한 차원이 아니라, 감정의 결이 완전히 다르다고 느껴질 만큼의 차이다. 다르다기보다, 아예 정반대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나는 그 차이를 "시간"의 양상이 아닌, "시간 안에 담긴 감정의 밀도(카이로스의 시간)"로 설명하고 싶어졌다. 크로노스적으로는 같은 시간에 같은 구조의 사건이 반복된 것이지만, 카이로스적 시각에서는 이 사건은 전혀 다른 시간이다.
2017년 1월 31일, 나는 첫 회사를 떠났다. 20대 중반의 나는 그때 스스로에게 많은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 과연 내가 정말 회사를 떠나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조차 서 있지 않았다. 회사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릴 만큼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내 불만이나 피로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어쩌면 모든 감정은 단지 경험이 부족한 나의 편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지만, 그 선택에 대한 확신은 끝까지 오지 않았다. 특히 내가 좋아하던 산업,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떠나는 과정은 더 복잡했다. 떠나고 싶은 마음과 아쉬움이 동시에 뒤엉켜 있었다.
두 번째로는, "더 잘돼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이 있었다. 지금 가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다음은 반드시 그보다 나아야 한다는 막연한 다짐 같은 것이 나를 지배했다. 연봉은 조금 더 높아야 하고, 회사의 이름값도 더 있어야 하고, 혹은 전략기획처럼 더 멋있어 보이는 부서에서 일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 목표는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비교와 경쟁의 언어였다.
세 번째는 "불안"이었다. 대학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내 안의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과제를 해도 불안했고, 좋은 성적을 받아도 그 뒤가 불안했다. 사람을 만나도, 만나지 않아도 불안했고, 어디에도 마음이 완전히 머물지 못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고, 더 빠르게 결과를 내려고 했다. 불안을 해결하려는 방식은 늘 성취였고, 그것이 내가 학위를 빨리 마치고, 빠르게 다시 취업한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나에게 어떤 성장의 기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불안을 견뎌낸 기록’이기도 했다.
퇴사일까지도 내 감정을 명확히 인식하기 어려웠던 이유를 알고 싶어서, 나는 같은 기준으로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크로노스적 반복 속에 놓인 2025년의 퇴사를, 카이로스적인 감정의 밀도로 다시 해석해 보기로 했다.
첫째, 지금의 나는 회사를 떠나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없다. 이번에는 판단이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 회사를 저연차 시절부터 고연차가 되기까지, 실무자와 관리자 사이의 위치들을 모두 거치며 경험했다. 조직을 바라보는 관점이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실무의 맥락과 관리의 요구사항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느낀다. 회사는 정말 괜찮은 조직이었다. 나에게는 늘 적절한 기회가 주어졌고,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크지 않았다. 이 조직이 가진 사업 구조나 방향성도 내가 충분히 즐기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관리자 역할로 올라가면서 요구되는 역량들이, 내가 키워가고 싶은 방향성과는 조금씩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차이에 대해 나는 꽤 오랫동안 고민했고, 그 고민의 시간들이 하나의 결론을 만들었다. 현재의 재미나 안정감이 아무리 크더라도,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답답함이나 후회감은 지금보다 훨씬 더 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는 일은 여전히 두렵고 불안하지만, 더 두려운 건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확히 판단할 수 있었다. 무섭더라도 놓아야 한다고.
둘째, ‘잘 즐겨야지’라는 마음이 있다. 예전에는 ‘잘 되어야지’라는 생각이 앞섰다면, 지금은 ‘잘 살아야지’라는 생각이 더 크다. 나에 대한 이해가 생긴 영향일 수도 있고, 단순히 나이가 들면서 생긴 변화일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어떤 환경과 맞지 않는지, 내 안에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는지를 이전보다는 훨씬 더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으로 나아가는 지금, 내 삶의 시간을 더 나답게 사용하는 것에 집중하려 한다.
삶이나 커리어에 대한 방향성은 분명하다. 어느 쪽으로 가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에 대한 감각은 있다. 하지만 그 길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여백이 많다. 예전 같았으면 이 공백이 불안하게 느껴졌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오히려 이 불확실함이 나에게는 일종의 여유로 다가온다.
요즘의 나는 거시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보다, 미시적인 시간 안에서의 몰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루를 잘 사는 것, 지금의 경험을 충분히 누리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감각을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이 더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지금은 계획의 세부보다도 "지금 내가 흥미를 느끼는 일"을 중심에 두려 한다. 그 선택들이 결국은 방향성을 비껴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다.
나는 이제 나의 시간들이 단지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나를 형성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어디에 도착하는가 보다, 그 시간 안에서 내가 누구였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셋째, 불안함도 함께 살아가는 감정 중 하나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사실, 이런 큰 전환기를 앞두고 아무런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너무 담담하다면 그게 이상할 것이다. 나는 이제 불안을 제거하거나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이 단순한 심리적 무장이나 자기 위로는 아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애초에 고정되지 않는 것이고, 희로애락이 함께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니, 불안이라는 감정도 그 안의 한 축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불안 속에서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이번 시간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 대학원 생활은 빠르게 학위를 마치고 더 좋은 타이틀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내 목표는,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있다. 이전에는 결과가 중요했다면, 이번에는 시간이 어떻게 기억되는지가 중요하다. 그 자체로 삶의 밀도를 채워주는 순간들로 채워지길 바란다.
이처럼 겉으로는 비슷한 시기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채운 감정의 결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나는 그 차이를 아주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과거의 나는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무언가를 더 하려 했고, 지금의 나는 불안을 수용하며 그 안에서 멈추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2017년의 나는 가능성을 찾아 어디든 가야만 했지만, 2025년의 나는 방향을 확인한 후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기로 했다. 이전에는 증명하려 했고, 지금은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번의 선택은 단순한 전환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걸어온 시간들을 조용히 정돈하고,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방식이다. 여전히 나는 완성된 사람이 아니고, 여전히 길 위에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보다 조금 더 나를 이해한 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그 길을 걷고 있다.
이번 여정이 어떤 성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결과보다,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더 마음을 두고 싶다. 불확실한 앞날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매 순간 나에게 솔직한 선택을 하고, 주어진 시간을 나만의 호흡으로 채워가고 싶다. 이 시간이 어떤 목표를 향해 정확히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흐름 안에서 나를 조금 더 나답게 만들어주는 경험들, 그리고 밀도 있게 존재했던 순간들로 남기를 바란다.
이렇게 2017년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감정의 결로 비교해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조금은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런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괜히 기분 좋게 다가온다. 이럴 때 문득, 헤밍웨이의 말이 떠오른다.
There is nothing noble in being superior to your fellow man.
True nobility is being superior to your former self.
진정한 고귀함은 남보다 나은 데 있지 않고, 과거의 나보다 나아졌는지를 아는 데 있다.
Ernest Hemingway
언젠가 이 시간을 돌아보았을 때,
이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기억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