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의 온기

관계의 탄력성(The Resilience of Relationships)

by 유지경성

오늘 회식을 끝으로, 이제 정말 직장생활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퇴사 소식을 전하자, 이전에 함께 일하다 퇴사하여 흩어졌던 전 팀원들까지 모두 자리를 함께해 내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주었다. 특히나 오늘은 폭우까지 쏟아진 오늘 같은 날, 서울 이곳저곳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얼굴을 보여주러 온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의 직장생활을 돌이켜보면, 나는 그리 착한 직장인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상사의 말에 늘 순응하며 묵묵히 따르기도 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불편한 이야기를 피하기보다는, 해결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적절한 타이밍과 공감대를 고려해 목소리를 냈다. 물론 어떤 일들은 그저 묵묵히 감수하고 해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장기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꺼내놓고 이야기하려 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상무님과 다툰 적도 있었고, 서로 감정이 상해 냉랭했던 순간도 많았다.


나는 둥글지 못한 성격이다. 애매한 건 싫고, 물음표보다는 마침표를 좋아한다. 해결해야 할 일은 명확하게 처리하고 넘어가야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상사 역시 사람이기에, 때로는 날이 서 있거나 판단이 흔들릴 때도 있다. 그런 날엔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했다. 팀장과 부딪히는 순간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내가 문제를 제기해도, 상무님은 그것을 항명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태도가 내가 그를 오랫동안 따르게 만든 이유였다. 실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람 그 자체가 따뜻한 사람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갈등이 생겨도 그 다음날 커피 한 잔 나누며 자연스럽게 풀 수 있었고, 우리는 단 한 번도 멀어진 적이 없었다. 어쩌면 마음 넓은 큰 형의 마음으로 나의 부족함을 바라봐주었던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직장생활은 참 묘하다. 일이 술술 풀리는 날도 있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날도 있다. 일이 안 풀려도 사람과의 관계 덕분에 마음이 편한 날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일이 잘 풀려도 인간관계에 상처받아 하루가 망가지는 날도 있다. 결국 중요한 건, ‘고립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머릿속에서 자체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기대하고, 또 실망한다. 나 역시 그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불편하더라도 대화를 시도하려 했다. 처음엔 갈등이 있더라도, 결국 이야기를 나누면 상대를 이해하게 되고 함께 해결책을 찾게 된다. 혼자서 생각하고 기대하던 결과보다 다른 결과들을 마주할 때도 많았다. 이 사람과는 무언가 안될 것 같았는데, 잘 해결되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이 과정은 많은 에너지와 의지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관계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팀원들과의 관계 역시 다르지 않았다. 프로젝트에 몰두하다 보면 체력은 바닥나고, 감정은 예민해진다. 일은 지체되고, 고객의 요구는 나에게 집중된다. 그런 상황에서 감정을 밖으로 터뜨리기보단, 스스로 정리하고 최대한 실용적인 피드백을 주려 노력했다. 내가 대단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 생각한 적은 없기에, 늘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정말 게으르거나 의도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팀원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물론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 마음이 걸리면 조용히 티타임을 가지며 풀어가곤 했다.


어떤 관계는 애초에 가까워질 수 없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함께 보내도, 성향이나 가치관이 너무 다르면 결국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이에서도 서로가 진심을 다해 조직을 생각하고, 업무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며, 상대방을 존중하려는 노력이 느껴진다면, 비록 친해지진 못하더라도 ‘이 사람은 나와 맞진 않지만, 이런 강점이 있다’, ‘이런 부분은 정말 존중할 만하다’는 인식이 생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일에 대한 태도와 서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존중의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런 관계의 복원 과정을 관계의 회복 탄력성(The Resilience of Relationships)이라 부른다. 일과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어떤 사람들은 작은 충돌에도 관계를 끊어버리지만, 내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후에도 관계를 회복하고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회생활이라는 건, 결국 이런 수많은 감정의 순간들을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감정을 조율하고, 다양한 상황 속에서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점점 성숙해지는 것. 나는 그것이 진정으로 ‘일을 잘하는 사람’의 모습이라 믿는다. 나 또한 직장생활 초년 시절보다 이제는 조금 더 부드럽고, 감정을 헤아릴 줄 아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려 노력하고 있다.


요즘엔 인수인계며 프로젝트 브리핑이 이어지는 날들이다. 오늘도 상무님은 내게 팀원들에게 경험을 공유하라고 하셨다. 처음엔 솔직히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하는 마당에 이런저런 자리라니 다소 귀찮지만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런 회의 자리에서 팀원들을 모두 불러서 상무님은 “부장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팀이 힘들던 시기에 잘 이끌어줘서 고맙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간 맡았던 프로젝트들을 소개하고, 팀원들과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나눈 정보들이 얼마나 유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자리를 통해 얼굴을 마주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다시금 깨달았다. 내가 직장생활 속에서 진정으로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들은 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걸. 다양한 문제를 함께 겪고 풀어나가며, 팀장과 팀원들이 서로의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하나의 팀이라는 믿음이 서로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 밖의 삶도 결국 비슷하다. 관계란 지속성 위에 존재하고, 믿음과 교감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견뎌낸다. 부모님과의 관계도, 친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떤 관계든, ‘기쁨’만으로는 깊어질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며 교집합이 생기고, 거기서 희로애락이 피어난다. 어릴 적엔 ‘즐거운 관계’만이 좋은 관계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안다. 불편함이 존재하지 않는 관계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짜 관계는, 불편함을 함께 겪고도 다시 곁에 남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힘든 날들을 지나며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가장 많이 부딪힐 수 있는 사이가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솔직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자주 충돌하고, 그만큼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갈등은 때때로 관계의 거리보다 진정성의 척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조직적으로도 앞으로의 삶에서 이런 관계를 또다시 마주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겉으로 보기엔 부딪히고 멀어지는 것 같아도, 그 안에 진심과 존중이 깃든 관계. 때로는 다투고도 결국은 곁에 남는, 그런 사람과 다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며.